100대 명산 사찰, 소백산과 초암사
"100대 명산"은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하고 산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2002년 10월 산림청에서 선정 공표하였습니다. 산림청에서 선정한 "100대 명산"은 학계, 산악계, 언론계 등 13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추천받은 105개 산과 산악회 및 산악 전문지가 추천하는 산,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선호도가 높은 산을 대상을 산의 역사, 문화성, 접근성, 선호도, 규모, 생태계 특성 등 5개 항목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심사 후 선정하였습니다. 100대 명산에는 국립공원(31)ㆍ도립공원(15)ㆍ군립공원(10) 지역에서 56개가 선정되었습니다. 또 가리왕산, 운장산, 황악산 등 생태적 가치가 큰 산(16)과 역사, 문화, 경관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한 산(28)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가를 즐기기 위해 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가족과 동료, 연인과 아름다운 산을 오르기 위해 등산하는 것도 좋지만, 명산(名山)에 천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사찰이 있다면 사찰의 역사와 의미, 그리고 우리 문화유산을 같이 둘러본다면 더욱 즐거운 등산이 되지 않을까 해서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이어주는 글을 연재하고자 하오니 즐거운 산행하시기 바랍니다.
소백산 소재지 및 높이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산높이 : 1439.7m
100대 명산 선정이유
국망봉에서 비로봉, 연화봉으로 이어지는 해발 1,300여m의 일대 산군으로 1,000m이상은 고원지대와 같은 초원을 이루고 있으며, 국망천과 낙동강 상류로 들어가는 죽계천이 시작되고 국립공원으로 지정(1987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주봉인 비로봉 일대에는 주목군락지(천연기념물 제244호)와 한국산 에델바이스인 솜다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음. 희방사(喜方寺), 구인사, 소수서원(紹修書院 : 사적 제55호), 부석사(浮石寺), 온달성, 국립천문대 등이 유명하다.
소백산 상세정보
소백산(1439.7m)은 백두대간이 거느린 명산 중 하나다. 동쪽에서부터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 죽령 너머의 도솔봉 등 1000m가 넘는 봉을 연결하는 장쾌한 능선이 20km 이상 뻗어 있다. 이중 도솔봉을 제외한, 소백의 삼봉(국망봉 비로봉 연화봉)은 13km가량 떨어진 채 일렬로 쭉 솟아 있다. 운해라도 끼면 큰 봉우리들은 망망대해의 섬인듯 갖가지 모양으로 구름 속에 떠 있어 장관을 연출한다.
소백산은 5,6월이면 철쭉꽃 붉은 바다를 이뤄 많은 등산인들을 불러들인다. 소백 삼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단연 압권이다. 8월이면 부드러운 초원길엔 온갖 고산식물로 뒤덮여 하늘에 떠 있는 식물원에 와 있는 듯하다. 비로봉 일대의 주목군락은 원시성을 간직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웅장하면서 부드러운 산세의 소백산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골짜기는 희방골로 많은 등산인들이 이곳에서 출발해 산행을 시작한다.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소백산은 우리 나라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한국의 알프스' 라 불린다. 이 산은 총 면적이 320.5km에 달하는 거대한 산줄기로 정상인 비로봉을 비롯하여 연화봉(1,376.9m), 제 2 연화봉(1,357.3m), 국망봉(1,420.8m) 등 1천m 고봉이 줄지어 있어 웅장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소백산 등산코스
신라 마의태자의 슬픔을 간직한 국망봉 탐방코스
▶초암사코스
-초암탐방지원센터에서 초암사, 봉두암을 거쳐 국망봉으로 올라가는 탐방코스
-비교적 완만한 탐방코스로 봉두암까지 시원한 계곡을 끼고있는 탐방코스
-봉바위, 돼지바위 등 상징적인 바위와 아름다운 계곡이 흐르는 생태탐방코스
국망봉 코스는 겨울 눈꽃산행에 적합한 코스로, 특히 1월에는 눈과 어우러진 계곡과 절벽들 사이로 나무에 피어있는 눈꽃이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5월~6월 국망봉 봉우리 주변에는 신선이 놀다 갔을 것 같은 아름다운 철쭉이 장관을 이룬다.
▷초암탐방지원센터~국망봉 구간(5km, 2시간 40분)
초암탐방지원센터 - 국망봉 탐방로는 초암탐방지원센터에서 초암사까지는 포장도로, 초암사 이후로는 나무계단과 흙길로 된 탐방로를 걸으며 이동하게 된다.
초암사부터 봉두암까지는 계곡을 따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갈 수 있는 반면, 봉부암 이후로는 나무계단을 따라 능선을 오르는데, 겨울에는 눈이 무릎 깊이 이상 쌓여 멀리서 보면 마치 절벽에 매달린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험준해지는 편이다.
마의태자
후삼국시대 후기 신라는 제55대 경애왕이 견훤의 압박으로 자결한 후 힘을 잃고 고려와 후백제의 대결을 관망하는 정세가 수 년간 이어졌다. 한동안은 두 나라가 서로 이기고 지는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935년(경순왕 9년) 후백제에 정변이 일어나 신검이 즉위하고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곧 탈출해 고려에 귀의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후백제가 혼란스러워지자 고려의 왕건이 사실상 후삼국시대를 통일할 가능성이 확실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시 신라의 임금이었던 경순왕은 대세에 따라 스스로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심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935년 10월 경순왕이 나라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군신 회의를 소집하여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바치는 항복을 논하는 자리에서 마의태자는 동생 덕지(德摯) 왕자 및 이순유(李純由) 등과 함께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결국은 경순왕의 뜻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옮겨가자 그는 동생 덕지(德摯) 왕자와 함께 개골산(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로 된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초근목피하였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때문에 금강산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담긴 장소가 많은데 태자성(太子城), 용마석(龍馬石), 삼억동(三億洞)이 그러한 장소이며 비로봉 정상에서 외금강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비탈길에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을 마의태자릉이라고 부른다.
이 때 그의 남동생도 처자(妻子)를 버리고 마의태자와 함께 개골산에 들어갔다가 이후 화엄종에 귀의(歸依)하여 승려가 되어 법수사와 해인사에 거처하였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혹은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는 동생 덕지(德摯. 또는 덕주공주)와 함께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머물다가 혼자 개골산으로 갔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서는 강원도 인제로 가서 신라의 남은 충신들과 지사들을 규합해 고려에 저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일부에서는 개골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인제를 거쳐간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초암사 역사와 유래
초암사(草庵寺)는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인 소백산 국망봉 남쪽의 죽계구곡(竹溪九曲)에 있다.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676년(문무왕 16)에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기 위해 절터를 보러 다닐 때 이곳에 임시로 초막을 지어 수도하며 기거하던 곳이라는 설이다. 둘째는 의상이 지금의 부석사 터를 찾아서 불사를 시작했는데, 서까래가 없어져 도력(道力)으로 살펴보니 이 절터에 떨어져 있었다.
의상은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라 믿고 여기에 초암을 짓고 한동안 수행한 뒤 부석사를 건립했다고 한다. 사찰의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지만 『순흥지(順興誌)』에 따르면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승려 김상호가 지었다는 토굴은 1950년 6.25전쟁으로 전소하였다. 승려 이영우와 민덕기가 연이어 이 사찰에 거처하였고, 이후 승려가 없어 폐사 직전에 있던 것을 1970년대 초반 비구니 보원이 주석하면서 사찰을 다시 일으켰다.
초암사 불교 문화유산
▶초암사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다.
현재 기단의 맨윗돌 일부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완했고, 갈라짐이 심한 위층 기단은 철사로 감아 더 이상의 파손을 막고 있다. 위ㆍ아래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힘껏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 탑신부에 비해 기단부가 왜소하여 안정감을 잃고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아래층 기단에 새긴 가운데기둥의 조각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석탑으로 보인다.
▶초암사동ㆍ서부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으로, 초암사에 자리한 이 부도는 그 주인공을 아직 알 수 없다. 초암사는 소백산 기슭의 조그마한 사찰로,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는데, 대사가 부석사 자리를 구할 때 초막을 지어 기거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부도는 아래ㆍ가운데ㆍ위의 세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을 올렸는데, 바닥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바닥돌은 각 면에 안상(眼象)을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8면마다 연꽃무늬를 조각하였고, 윗면에 3단의 괴임을 두어 윗돌을 받고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8각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둥글넓적한 윗받침돌은 연꽃무늬를 둘렀다. 탑신의 몸돌은 8면 중 4곳에 문짝모양을 새겼고 그 안에 자물쇠를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경사면 끝을 따라 선을 조각했고, 윗면에 연꽃잎을 둘러 새겼다.
현재 탑신의 몸돌과 가운데받침돌이 서로 뒤바뀐 상태이고 윗받침돌도 뒤집혀 있다. 기단부의 연꽃무늬가 형식화되고 높직한 가운데받침돌이나 탑신의 모습 등으로 보아 제작된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측된다.
100대 명산 대찰(名山 大刹) 이야기 - 종합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