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국보와 보물)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의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석사 '사찰의 역사'와 우리의 소중한 불교 문화유산중 '국보' 관련 내용은 아래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영주(봉황산) 부석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43)-국보편
부석사 세계문화유산 등재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이야기
원효와 의상은같은 시대를 살았다. 한국 지성사의 두 거두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행보는 사뭇 달랐다. 두 사람은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뒤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나 의상은 혼자서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원효는 해골물을 통해 일체유심조를 깨달아서 오랫동안 준비했던 유학을 포기할 정도로 강렬한 깨달음이었으니 그 목소리에는 뜨거운 열기가 묻어 있었을 것이다. 굳이 유학을 가지 않더라도 이 정도 깨달음이면 충분하다고 얘기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의상은 자기 길을 향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원효의 깨달음은 원효의 것이지 의상의 것이 아니었다. 자기 스스로가 깨닫지 않는 한 그것은 온전하게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밥 먹는 모습을 아무리 많이 보더라도 내가 직접 먹지 않으면 내 배가 부르지 않는 법이다. 이것이 의상의 결론이었다. 의상은 다른 사람이 옳다고 여긴 길을 무턱대고 따라가는 대신 자신의 길을 택했다. 자신의 힘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깨달을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에 도착해 양주(楊州)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그 지역의 유지인(劉至仁)이란 장수가 의상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관아 안에 머무르게 하면서 지극하게 공양을 올렸다. 유지인에게는 선묘(善妙)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의상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저런 눈빛을 가진 남자라면 한평생 의지하고 살아도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의상이 수행자라서 여러 번 망설이던 선묘 낭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복숭아꽃이 붉게 피어나던 정원에서였다. 의상의 대답은 역시나였다. 자신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목숨 걸고 계를 지키는 수행자라는 것. 색욕의 세계는 이미 버렸으니 부디 자신을 원망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분명한 거절이었다. 말을 마친 의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장안으로 떠났다.
양주를 떠난 의상은 중국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의 문하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화엄학을 공부했다. 지엄의 문하에는 의상보다 19세 어린 현수법장(賢首法藏)이 있었는데 그는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었고 의상은 신라로 귀국해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 즉 신라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10년이 지난 후 의상은 귀국선에 오른다. 그의 귀국 소식은 선묘 낭자의 귀에까지 들렸다. 그녀는 선물 상자를 들고 항구로 달려갔다. 10여년 전 의상에게 사랑을 거절당한 후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의상에 대한 집착은 숭고한 사랑으로 변해 있었다. 다시 태어나도 의상 스님께 귀의하여 그림자처럼 따르며 힘이 되겠다는 결심과 함께 말이다. 그런 결심으로 항구까지 달려온 길이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은 잔인했다. 그녀가 항구에 당도했을 때는 배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녀는 절망했다.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며 서성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바다에 상자를 던졌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이렇게 기도했다. "저는 오래전에 스님께 귀의하기로 결심한 몸입니다. 부디 이 몸이 용이 되어 스님이 탄 배가 무사히 신라 땅에 닿아 법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선묘는 바다를 향해 그대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은 용으로 변했다. 용이 된 선묘 낭자의 도움으로 의상이 탄 배는 무사히 신라 땅에 도착했다.
신라에 도착한 의상은 낙산사를 창건한 후 영주에 화엄도량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산적들의 방해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선묘용은 번갯불을 일으켜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그것도 모자라 봉황이 되어 큰 바위를 세 번이나 공중에 들었다 놨다 했다. 깜짝 놀란 산적들은 모두 굴복하고 의상의 제자가 되었다. 부석사(浮石寺)는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고 뒷산은 봉황산이다. 부석사에는 선묘 낭자의 스토리를 증명이라도 하듯 ‘선묘각’이 세워져 있고 선묘 낭자의 영정이 봉안되었다.
부석사 문화유산(국보와 보물)
종목 | 명칭 | 시대명 |
보물 |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 통일신라 |
보물 |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 통일신라 |
보물 |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 고려시대 |
보믈 |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 | 조선시대 |
보물 | 영주 부석사 석조여래석가좌상 | 통일신라 |
보물 | 영주 부석사 안양루 | 조선시대 |
보물 | 영주 부석사 범종각 | 조선시대 |
▶삼층석탑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1956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철제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당간지주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오불회 괘불탱
이 괘불은 1745년에 조성된 오불회도(五佛會圖) 형식의 괘불로서, 부석사에 전래되어 오던 1684년작 괘불을 청풍 신륵사로 이안하고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1684년작 괘불의 도상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노사나불을 새롭게 첨가하였다. 즉 가로축으로는 비로자나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을, 세로축으로는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을 배치하여 삼세ㆍ삼신의 오불회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중심은 영산회상의 설주(說主)인 석가모니불이다. 이와 같은 삼신ㆍ삼세불화 형식은 일본 주린지(十輪寺) 소장 오불회도(15세기)와 안성 칠장사 오불회괘불탱(1628년)에서도 볼 수 있어 조선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후기에 정착한 도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오불회 형식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단행된 종단의 통폐합에 따른 삼신불, 삼세불 사상의 결합으로 나타난 도상으로, 이 괘불은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대형의 군도형식의 불화임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구도를 보이고 인물묘사에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필치를 보이는 등 18세기 중반경의 격조 높은 불화양식을 대변한다.
▶석조석가여래좌상
부석사 자인당에는 거의 같은 규모의 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2구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이며, 1구는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의 도상특징을 보여준다.
이 불상은 1958년 11월 부석사 동쪽의 약사곡에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인당에 이미 보물로 지정된 두 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동그란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과 꽃문양이 조각된 승각기,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높은 삼단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7사자, 합장 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좌 뒷면에 조각된 지장보살상은 특이한 예로 주목되며, 높고 화려한 대좌는 양감이 강조된 불상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거의 훼손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삼단대좌와 불상은 다소 장식화 경향을 보이는 통일신라 9세기의 전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안양루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문루로, 국보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의 형식을 가진, 16세기 사찰 문루 건축의 대표적 사례이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전체 사찰배치에서 사찰의 진입 축(軸)을 꺾어 무량수전 영역에 진입하게 하고 있어, 무량수전 영역의 종교적 경외감과 조망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아래층은 모두 기둥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 칸에 계단을 두어 무량수전으로 통하는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누하진입(樓下進入)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안양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위층은 사방이 벽체가 없이 트여 있으며, 내부 바닥 전체가 우물마루로 되어 있어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범종각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종각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의 형식을 가진,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종각 건축이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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