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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등산 여행

100대 명산 사찰, 두타산과 삼화사

by 3000포석정 2023.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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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명산"은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하고 산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2002년 10월 산림청에서 선정 공표하였습니다. 산림청에서 선정한 "100대 명산"은 학계, 산악계, 언론계 등 13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추천받은 105개 산과 산악회 및 산악 전문지가 추천하는 산,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선호도가 높은 산을 대상을 산의 역사, 문화성, 접근성, 선호도, 규모, 생태계 특성 등 5개 항목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심사 후 선정하였습니다. 100대 명산에는 국립공원(31)ㆍ도립공원(15)ㆍ군립공원(10) 지역에서 56개가 선정되었습니다. 또 가리왕산, 운장산, 황악산 등 생태적 가치가 큰 산(16)과 역사, 문화, 경관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한 산(28)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가를 즐기기 위해 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가족과 동료, 연인과 아름다운 산을 오르기 위해 등산하는 것도 좋지만, 명산(名山)에 천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사찰이 있다면 사찰의 역사와 의미, 그리고 우리 문화유산을 같이 둘러본다면 더욱 즐거운 등산이 되지 않을까 해서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이어주는 글을 연재하고자 하오니 즐거운 산행하시기 바랍니다.
 

<두타산, 월간 山>

 

두타산 소재지 및 높이

-소재지 :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삼척시 미로면ㆍ하장면
-산높이 : 1357m
 

100대 명산 선정이유

무릉계곡 등 경관이 아름다운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삼화사(三和寺), 관음암(觀音庵), 두타산성(頭陀山城)이 있음. 바위에 50여개의 크고 작은 구멍이 패여 산이름이 붙여졌으며, 예로부터 기우제를 지내는 등 토속신앙의 기도처인 쉰움산(五十井山)이 유명하다.
 

 

 

두타산 상세정보

계곡 이름을 무릉계(武陵溪)라고 했다. 얼마나 대단한 경치면 감히 "무릉도원은 바로 여기"라고 내세웠다. 두타산과 청옥산, 고적대, 갈미봉, 1243봉으로 둘러싸인 반석계곡이다.
 
가보면 고개를 끄덕이게될 것이다. 벼루처럼 매끄러운 바위운동장에 무수한 글씨가 새겨져있고 한켠으로는 맑은 물이 렌즈처럼 얇게 흐른다. 골짜기로 들어가면 여기도 폭포 저기도 폭포, 깎아세운 절벽 위엔 층층이 소나무들… 내가 정말 무릉도원에 들어왔구나 싶으리라.
 
무릉계 물받이의 남쪽 울타리를 이루는 청옥ㆍ두타산은 언제나 쌍둥이처럼 붙어다닌다. 뗄 수 없이 돈독하고 가까운 동시에 무릉계라는 보물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김새는 사뭇 달라 청옥은 듬직한 육산(肉山)인 반면 두타는 울끈불끈 골산(骨山)으로 되어있다.
 
문자속이 있는 이는 쌍둥이 이름이 맞바뀌었나 의심할 것이다. 푸른 옥 청옥은 바위산에 붙여야 맞으며 집착을 버리고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는 두타는 저 요란한 무릉계곡을 지긋이 굽어보고있는 후덕한 봉우리에 어울리는데 모순없는 논리는 진실이 뒷받침한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분명 북쪽것이 두타라고 나와있다. 청옥은 두타고 두타는 청옥인 것이다.
 
두타산은 부처가 누워있는 형상으로 박달령을 사이에 두고 청옥산과 마주하고 서 있다. 울창한 수림과 기암절벽에 노송이 뿌리를 내려 산세가 수려한 두타산은 강원도 국민관광지 1호로 지정돼 있다. 두타산의 '두타(頭陀)'란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를 닦는 수행'을 말한다. 이는 두타산이 불교와 인연이 깊은 불교의 도량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삼화사,관음암,천은사가 남아 있지만 10여개의 사찰이 있다는 옛기록으로 보아 무릉계는 불교가 크게 번성했던 두타의 도량이었던 같다.
 

두타산 등산코스

두타산 등산로는 여러코스가 있으며▲관리사무소에서 무릉계곡을 즐긴 뒤 박달령을 거쳐 두타산을 밟고 두타산성으로 하산하면 최소 8시간은 걸린다. ▲관리사무소에서 두타산성을 거쳐 두타산을 밟고 그 길로 하산하면 7시간 정도 소요. ▲관리사무소에서 두타산성을 거쳐 두타산과 청옥산 정상을 밟고 연칠성령과 사원 터를 지나 원점회귀하면 10시간은 잡아야 한다. ▲정상을 밟지 않고 관리사무소에서 베틀바위 전망대~미륵바위를 지나 두타산성으로 내려오면 3시간 정도 소요. ▲무릉계곡 끝 용추폭포까지 천천히 구경하면서 갔다가 그대로 내려오면 그것도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참고로 두타산 정상은 초보 산악인들은 여름에는 생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상을 가려면 무릉계곡에서 두타산성을 거쳐 올라서는데, 무릉계곡주차장에서 해발고도 1,200m를 올라야 해서 시간과 체력 소모가 큰 코스다.
 

<두타산 무릉반석(상), 두타산 용추폭포(좌), 두타산 쌍폭(우), 월간 山>

 
무릉계곡
무릉은 중국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유래했다. 세상과 따로 떨어져 복숭아꽃이 만발한 별천지 같은 곳이라는 의미다. 실제 무릉계곡은 그 명칭에 손색없으며, 길이는 약 4㎞ 된다. 입구 호암소에서부터 시작해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용추폭포까지를 말한다. 무릉반석, 쌍폭, 용추폭포, 학소대, 양사언 석각 등 기암괴석과 조선시대 기우제를 지낸 산답게 끊이질 않는 깊고 푸른 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정말 무릉도원에 온 듯 환상적인 착각에 빠지게 한다. 용추폭포와 무릉반석은 동해 2경과 3경이다.
 
무릉반석
1,500여 평이나 되는 하나의 흰돌로 평평하게 이뤄져 있어 주변의 기암괴석과 함께 절경의 장관을 연출한다. 자연의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한다. 또한 암석에 수 놓은 듯 새겨진 갖가지 석각은 해석하는 재미와 함께 옛 선비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석각은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다. 그 아래에 '옥호거사서신미중춘玉壺居士書辛未仲春'이 있다. 옥호거사가 신미년 봄에 글을 남겼다는 의미다. 무릉선원은 도교 신선사상을, 중대천석은 유교사상을, 두타동천은 불교사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석각은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1571~1576) 기간에 전임 정두형 부사의 부친상 관계로 신미년(1571)에 광천을 방문했을 때 무릉계곡에 와서 썼다는 설이 있고,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부사 재직(1750~1752) 기간 중인 신미년(1751)에 무릉계곡을 방문해서 남겼다는 설도 있다.
 
용추폭포
용추폭포는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모양을 지닌 폭포로 상탕, 중탕은 옹기항아리 같은 형태로, 하탕은 진옥색의 큰 용소로 이뤄져 있다. 폭포 한쪽에는 어느 묵객이 새겨놓은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대형석각이 용추폭포의 자연경관을 적확하게 대변해 준다. 부사 유한준이 '용추龍湫'라 이름 짓고 글을 썼다고 전한다.
 

 

삼화사 역사와 유래

삼화사 건립에 대하여 3가지 설이 있습니다. 즉 삼화사사적(三和私史蹟)에 근거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에 의한 창건설, 강원도지(江原道誌)에 근거한 통일신라 흥덕왕 4년(829) 창건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근거한 범일국사 창건설이 그것이다.
 
첫째, 선덕여왕은 불교신앙을 통하여 강력한 국가정신을 수립하고자 하였으며, 이같은 계획의 하나로 당나라에 유학 중인 자장율사를 불러들여 경주에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고, 지방에는 오대산을 중심으로 불교 성역화를 추진하였다. 삼화사는 선덕여왕이 오대산 성역화를 추진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창건되었다. 결국 삼화사는 국가정신의 수립이라고 하는 호국사찰의 성격을 띠고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강원도지에 근거한 통일신라 흥덕왕 4년(829) 창건되었다는 것은 삼화사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 흥덕왕 4년(829)에 삼선이 두타산으로 왔다. 척주지(陟州誌)의 기록에 의하여 이들은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와서 서로 모의하였는데, 마치 옛날 제후들이 맹회하는 예와 같았다. 이들은 두타산의 모퉁이를 나누어 표지를 하였는데, 동쪽은 청련대, 서족은 백련대, 북쪽은 흑련대라고 하였다. 청련대는 지금의 지상사이며, 백련대는 영은사, 흑련대는 바로 삼화사이다. 이는 유학승이었던 선종의 승려들이 경주로부터 동해ㆍ삼척으로 와서 선종사찰을 창건하였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삼화사는 신라 하대에 교종 사찰에서 선종사찰로 전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근거하여 범일국사가 신라 말에 삼화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은 삼화사가 9산 선문 가운데 사굴산문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어 흥덕왕 대에 교종에서 선종으로 전환하고 신라 말 범일국사에 의해 9산 선문 가운데 사굴산문으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기록과 아울러 현존하는 유물들을 감안하면 삼화사는 대체로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화사 주요 불교 문화유산

<삼화사 삼층석탑(좌)과 철조노사나불좌상(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삼화사 삼층석탑
삼화사에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비교적 높아 보이는 기단은 각 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기단의 맨 윗돌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번갈아 쌓아 올렸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든다. 여러 군데에 금이 가 있고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대체로 잘 남아있고 균형이 잘 잡힌 단아한 모습이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신괴임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1997년 4월 대웅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이때 위층 기단 안에서 나무 궤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형탑 25기와 청동제 불대좌조각 2점, 철조각 6점, 문서를 기록한 종이 1매 등이 들어있었다.
 
철조노사나불좌상
삼화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철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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