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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오봉산) 청평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5)

by 3000포석정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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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청평사 역사와 유래

청평사는 영현(永玄)선사에 의하여 973년(광종24)에 백암선원(白巖禪院)으로 창건된 사찰로 이자현(李資玄)이 문수원(文殊院)으로 절 이름을 고치고 중창하여 고려 중ㆍ후기에 불교계의 한 축으로 활동하는 거사불교(居士佛敎:스님이 아닌 일반 속세의 남자)의 요람이 되었다. 이후 이암(李嵒)이 은거하여 또다시 거사불교의 맥을 이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설잠(雪岑) 김시습이 스님이 되어 이곳에서 수행하였다. 이처럼 거사불교가 번창하던 시기에 대감(大鑑)국 사 탄연(坦然)이 쓴 진락공중수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와 이암이 쓴 문수사장경비(文殊院藏經碑)가 건립되었고, 이는 후대에 한국의 거사불교와 더불어 서예사적으로 주목받는 사찰이 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태정황후의 지원으로 중흥기를 맞이하면서 원(元)나라 황실의 원찰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보우(普雨)가 주석하면서 명종의 원찰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가람배치에도 영향을 주어 산지중정형의 기본 가람형태를 띠면서도 조선시대 원찰들이 갖는 「□」자형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다. 법맥(法脈)을 보면 보우가 폐지되었던 승과를 부활하고 이를 통하여 등장한 휴정의 법맥을 이은 고승들이 주석하게 된다.

 

가람 역시 보우에 의하여 일신 중건된 후 임진왜란 당시에도 소실되지 않 았으며, 지안(志安)에 의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이루어져 법맥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출가승과 거사의 주석은 청평사가 폐사되지 않고 존속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거사불교의 중심지와 탄연의 진적이 남아 있 는 사찰로, 고려말에는 원나라의 원찰로서 기능하면서 이암의 진적이 남는 사찰이 되었다. 이러한 면을 볼 때 청평사는 영서지역에 가장 오래된 고찰일 뿐 아니라 사상사와 서예사에서 매우 주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또한 거사불교 와 굴산문의 법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조선시대의 원찰형 가람배치를 유구를 통해 살필 수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 중기에 예종이 차(茶)를 여러 차례 이자현에게 하사하여 현대에서는 이자현과 차 문화를 재조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청평사는 춘천과 강원도를 넘어 한국불교문화사에서 주목을 받는 사찰이다.

 

 

 

청평사 문화유산

종목 명칭 시대명
보물 춘천 청평사 회전문 조선시대
명승 춘천 청평사 고려선원  

<청평사 회전문,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청평사 고려선원 명승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청평사 회전문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 승현선사가 세워 백암선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몇 번에 걸쳐 고치고 절을 넓혔는데 청평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 명종 5년(1550) 보우선사가 이곳에 와 다시 고쳐 세운 뒤부터이다. 청평사의 회전문은 절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려는 의미의 문이다. 규모는 앞면 3칸ㆍ옆면 1칸이며, 앞면의 가운데 1칸은 넓게 드나드는 통로이고 양쪽 2칸은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간결한 형태로 짜여 있는데, 이는 주심포양식에서 익공계 양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이다. 건물 안쪽은 벽이 둘러진 공간에 사천왕상 등의 입상을 놓을 수 있게 했으며, 윗부분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만든 홍살을 설치하였다.

 

16세기 중엽 건축 양식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축물이다. 이 절의 서쪽 언덕에는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극락전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건축의 수법을 보여주던 중요한 건물이었다.

 

▶청평사 고려선원

청평사는 973년(고려 광종24)에 백암선원(白巖禪院)으로 창건되어 1,000년 이상을 이어 온 선원이다. 고려시대에는 이자현, 원진국사 승형, 문하시중 이암, 나옹왕사 등이, 조선시대에는 김시습, 보우, 환적당, 환성당 등이 이 곳에 머물렀다. 고려선원에 머문 당대 최고의 고승과 학자들은 학문과 사상을 전파하였고 뛰어난 문인들은 시문(詩文)으로 이 곳의 자연과 문화를 노래했다.

 

고려 선종 6년 이자현이 37년간 청평사에 머물면서 문수원을 중건하며 또한 청평사 주변 계곡에 암자(庵子)와 정자(亭子), 연못 등을 조성하였는데, 이렇게 조성된 고려선원은 자연과 인문학적 의미가 매우 크다. 선원을 확대한 곳이며, 지형지세를 이용해 자연과 인공을 조화롭게 조성하였다. 회전문(보물)과 청평사지(강원도기념물) 등 많은 유구와 유적이 있다. 이 곳은 산수가 빼어나며 아늑한 분지에 계곡, 영지(影池), 소(沼), 너럭바위, 기암괴석, 폭포 등이 어우러진 절경(絶景)으로 천혜의 산수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명승지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100대 명산, 오봉산과 청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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