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화사 역사와 유래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해 대가람이었으며 금산사, 법주사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이다. 동화사의 창건에는 두 가지의 주장이 있다. 「동화사사적기」에 따르면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가 중창했는데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꽃이 상서롭게 피어 있어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심지계조조(心地繼祖條)에는 신라 헌덕왕의 아들이었던 심지가 갖은 고행 끝에 속리산의 영심대사(永深大師)가 진표율사로부터 받은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수받아 팔공산으로 돌아온 후 불골간자를 모실 절터를 찾기 위하여 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다 절을 짓고 동화사라 했다는 기록이 있어 심지를 그 개조로 보기도 한다.
극달 화상의 창건연대인 493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의 시기이므로 공인되기 전에 법상종의 성격을 띤 유가사라는 사명이 붙여졌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우므로, 심지의 중창을 실질적인 창건으로 보는 것이 보통의 견해이다. 창건 뒤 863년(신라 경문왕 3년) 경문왕이 비로암 3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을 조성하였으며, 934년(경순왕 7년)에는 선사 영조가 절을 중창하였다. 고려에 들어서는 1036년(고려 정조 2년) 영통사, 숭법사, 부인사 등과 함께 경ㆍ율을 시험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며, 1190년(고려 명종 20년)에는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였다. 1294년(충렬왕 20년)에는 국사 홍진이 절을 중건하였다. 1319년(충숙왕 6년)에는 현승이 통도사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5과를 얻어와 이를 봉안하고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고려 문종 때에는 이 절에서 원천 법천사의 지선국사(智先國師)가 배출되었고 그 문하에서 속리산 승통 석규(釋窺)와 금산사 주지 혜덕왕사 소현(韶顯)을 비롯하여 1,000여 명의 승려들이 나왔다.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렸으며, 1608년(광해군 1) 절을 중건할 때 화주(化主) 학인(學仁)이 미륵전을 재건했고, 1725년(영조 1)에 다시 중창했다. 그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경내에는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동화사 문화유산
종목 | 명칭 | 시대명 |
보물 | 대구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 통일신라 |
보물 |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통일신라 |
보물 |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 통일신라 |
보물 |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ㆍ서 삼층석탑 | 통일신라 |
보물 | 대구 동화사 당간지주 | 통일신라 |
보물 |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 | 조선시대 |
보물 | 대구 동화사 대웅전 | 조선시대 |
보물 | 대구 동화사 목조약사여래좌상 복장전적 | |
보물 | 대구 동화사 아미타회상도 | 조선시대 |
보물 |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지눌진영 | 조선시대 |
보물 | 대구 동화사 삼장보살도 | 조선시대 |
보물 | 대구 동화사 지장시왕도 | 조선시대 |
보물 | 대구 동화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 조선시대 |
보물 | 대구 동화사 극락전 | 조선시대 |
보물 |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 | 조선시대 |
보물 | 대구 동화사 봉황문 | 조선시대 |
※동화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문화유산이 많은 관계로 일부 문화유산 소개는 생략합니다.
▶마애여래좌상
동화사 입구 오른쪽의 암벽을 다듬어서 조각한 불상이다.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부피감을 느낄 수 있는 비교적 풍만한 모습인데, 세부표현은 평면적이며, 짧은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고, 어깨는 반듯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어 손끝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았다. 원만한 얼굴, 장식성이 강한 대좌(臺座)와 광배의 표현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비로암 삼층석탑
동화사 서쪽 언덕에 자리잡은 비로암의 대적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린 정도가 크지 않은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6년 부처님의 사리를 담는 기구 일부를 도둑 맞았으나, 없어지지 않은 사리돌그릇에 통일신라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고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당간지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두 기둥이 66㎝의 간격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지주가 만들어진 시기는 당간지주에서 둔중함이 엿보이고, 동화사의 창건시기가 신라 흥덕왕 7년(832)인 것임을 참작하면 신라 후기로 추정된다.
▶사명당 유정 진영
등받이가 높다란 의자에 우향하여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의좌상(椅坐像)으로 신발을 벗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 결가부좌하고 앉아 손에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가는 선으로 윤곽을 짓고 이목구비를 표현하여 백묘법(白描法)을 보여주는 얼굴은 적당히 크고 길죽한 타원형으로 온화한 모습이나, 머리를 뒤로 약간 젖혀 내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하여 의승병 대장으로서의 기상이 넘쳐난다. 건장한 어깨와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턱수염은 승병대장 다운 기백을 강조해주는데, 다른 사명당 영정들에 비해 길어진 수염이 특징적이다. 국내에 전해오는 10여점의 사명당 진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자료이다.
▶대웅전
동화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후 8차례에 걸쳐서 새로 지었으며, 대웅전 또한 여러 차례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조선 후기인 영조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아미타회상도
이 불화는 1699년 대화원(大畵員) 의균(義均)을 비롯한 묘해(妙解) ㆍ지영(智英) ㆍ상명(尙明) 등이 참여해서 그린 아미타불화로서 불보살과 호법신중을 3폭에 나누어 그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은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반에 걸쳐 팔공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 대표적인 화사인 의균의 현존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불화라는 점에서 그의 초기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보조국사지눌진영
고려시대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의 진영으로, 흰색의 장삼과 가사를 입고 등 높은 의자에 앉아 석장을 쥐고 오른쪽으로 몸을 튼 자세로 앉아 있는 국사의 모습을 그렸다. 송광사 국사전 보조국사 진영(1780년)과 동일한 초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지만, 섬세한 필치의 인물묘사와 담채색에 가까운 옷의 채색기법 등에서 그보다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화사 사명당대사진영과 세부표현 및 필선 등 화풍이 매우 유사하여 동일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므로 보조국사진영 가운데 시기가 가장 올라가며 특히 화질의 면에서 뛰어난 것으로 판단되었다. 현존하는 보조국사 지눌의 진영 가운데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삼장보살도
삼장보살도는 죽은 이들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한 의식용 불화로 천장보살(天藏菩薩), 지지보살(持地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로 구성되는데, 고려시대의 사례로 알려진 것이 없고 조선시대에만 보이는 도상이다. 삼장보살도의 화폭 구성은 한 폭에 세 존상을 모두 표현한 경우, 두 폭에 걸쳐 표현한 경우, 세 폭으로 나누어 그린 경우가 있다.
16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삼장보살도들은 대부분 해외에 유존하고 있고, 그나마 17,18세기 초에 제작된 석탑사 삼장보살도(1699)나 대구 파계사 삼장보살도(1707) 조차 그 소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 삼장보살도가 갖는 불교회화사적 의의는 크다고 하겠다. 더불어 안정된 구도와 비례, 인물의 세부묘사, 채도가 높은 적ㆍ녹색의 안정감 있는 대비와 조화, 세밀한 필선과 정교한 문양 등 전반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화풍 상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팔공산을 중심으로 크게 활약한 화승 의균의 화풍도 뚜렷하여 화파(畵派) 연구에도 중요한 작품이다.
▶지장시왕도
동화사 지장시왕도는 조성연대가 확실하며, 참여한 화승들의 명단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며, 18세기 초 지장시왕도의 양상 및 경북 내륙 화사들의 화풍상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극락전
대구 동화사 극락전은 1600년(선조 33) 금당암 영역에 건립하고 금당(金堂)이라 했다. 또한 통일신라에 가람을 창건한 당시의 위치에, 당시의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부에 17세기 전반의 목조건축을 현재에 전하고 있다. 창건 당시의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감주나 이주 없이 동일한 기둥 간격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상부 목조가구의 기본 틀 역시 고대의 기법이 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마루바닥 하부에도 방전이 깔려 있는 등 고식의 기법이 많이 남아있다. 극락전의 공포 의장과 구조 역시 주목할 만하다. 먼저 고대의 기둥 간격 위에 17세기의 다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미세한 첨차 길이의 조정을 통해 공포대 구성의 의장적 통일성을 확보한 점에서 이 건물을 조영한 목수의 탁월한 실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제공의 내외부 끝을 교두형으로 처리하고, 추녀와 선자연이 걸리는 모서리 부분 퇴칸의 공포에 병첨을 사용하는 방식은, 17~18세기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기법으로, 특정 지역에서 활동했던 기술자 집단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봉황문
신라시대에 창건(極達和尙 또는 心地王師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봉황문으로 불리는 일주문은 조선후기 1633년(선조 11년)에 최초 건립되었다. 원래는 옹호문(擁護門) 자리에 위치하였으나 1965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봉황문 앞쪽에는 '팔공산동화사봉황문(八公山桐華寺鳳凰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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