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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장성(백암산) 백양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48)

by 3000포석정 2023.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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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국보와 보물)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백양사 역사와 유래

정도전이 1377년에 지은 「白巖山淨土寺橋樓記(백암산정토사교류기)」에 의하면 '신라 때에 어떤 異僧(이승)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백암사(白巖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후기 문신 홍종응(洪鍾應, 1783-?)이 1859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백양사의 「極樂殿佛糧禊序(극락전불량계서)」에 의하면 '633년에 백양사가 창건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異僧(이승)'은 대개 如幻(여환)으로 보고 있다.

 

백양사의 이름은 조선중기인 1574년(선조 7) 喚羊禪師(환양선사)가 정토사를 개칭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후기 읍지류인 「여지도서」 사찰조와 「장성부읍지」 사찰조, 불교 사지류인 「범우고」와 「가람고」에도 여전히 '淨土寺(정토사)'로 기록되어 있는 등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정토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백양사를 중창한 道巖(도암) 印正(인정,1805-1883)은 1840년(헌종 6) 이후 정토사를 중창하여 사명을 백양사라고 하였다는 사실에 무게감이 실리기도 한다. 이러한 백양사는 창건 이후 대체로 크게 다섯 차례의 중창이 있었다.

 

백양사 운문암

백양사의 산내암자로는 약사암(藥師庵)과 영천굴(靈泉窟), 1351년에 창건한 청류암(淸流庵), 1981년에 지은 수도도량 물외암(物外庵), 천진암(天眞庵) 등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있어 온 운문암(雲門庵) 등 많은 암자들이 6ㆍ25전쟁 때 불타버렸다.

 

이 중 운문암은 6ㆍ25전쟁 전까지만 해도 백양사 8개 암자 중 대표암자였으며, 백양사 뒤 계곡을 끼고 3.5㎞ 위에 있다. 고려 때 각진이 창건했다는 운문암은 백양사 수도도량 중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있으며, 조선시대의 신승 진묵(震默)의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진묵이 임진왜란 직전 이 암자에서 차를 달이는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체 대중이 차를 달이는 운문암 중을 조사(祖師)로 모시라는 현몽을 한 뒤 진묵을 조실(祖室)로 앉혔다. 어느날 진묵은 "내가 올 때까지는 이 불상을 도금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지금도 그 불상은 거뭇한 그늘색을 띤 채 진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백양사 문화유산

종목 명칭 시대명
보물 장성 백양사 소요대사탑 조선시대
보물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조선시대
보물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및 복장유물 조선시대
명승 장성 백양사 백학봉  

<소요대사탑(좌), 목조아미타여래좌상(중앙), 아미타여래설법도(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소요대사탑

이 부도는 백양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있던 것을 백양사 진입로에 위치한 백양사 박물관으로 이전한 상태이며, 백양사 주지를 역임한 소요대사(1562~1649)의 묘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156cm 규모의 탑으로, 기단부ㆍ탑신부ㆍ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소요대사탑은 백양사 이외에도 담양 용추사와 지리산 연곡사에도 있다. 이 중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은 탑신부에 새겨진 글에 의해서, 조선 효종 원년(1650)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백양사 소요대사탑 역시 소요대사가 입적한 시기와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의 건립연대 등으로 보아 1650년을 건립의 하한으로 볼 수 있다.

소요대사는 13세에 백양사에서 불도에 입문하였고 부림(浮林)에게 대장(大藏)을 배운 후 서산대사에게 신지(神旨)를 깨우쳤으며 백양사 조실(祖室)로 있었다. 장성 백양사 소요대사탑은 범종의 세부양식이 탑에 표현된 드문 사례이며 주인공이 확실하고 건립연대를 알 수 있어 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607년(선조 40) 조선 후기 현진(玄眞) 등 3명의 조각승이 제작한 불상으로, 돌아가신 선왕(先王)과 선왕후(先王后)를 비롯한 왕실 조상들의 성불(成佛)을 기원할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임진왜란 등 국가적 전란이 끝나고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진행된 불교 복구과정에서 제작된 것이자, 1610년 이전에 조성된 불상 중 규모가 가장 큰 대형 불상이다. 불사(佛事)의 전모를 알 수 있는 발원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좌 밑 묵서(墨書)에는 불상 제작과 관련된 연대와 제작자 등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17세기 불교조각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 불상을 주도적으로 만든 현진(玄眞)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으로,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기존에 알려진 그의 작품 중 가장 이르다고 알려진 1612년 제작 '진주 월명암 목조아미타불좌상' 보다 5년 앞서 조성된 것으로 조각사적 의의 또한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

 

아미타여래설법도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는 1775년(영조 51) 수화승 색민(嗇敏)을 비롯한 총 11명의 화승들이 참여해 제작한 불화로, 1775년 극락전 아미타불상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제작된 작품으로, 1994년 9월에 도난당했으나 2006년 9월 회수되었다.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는 안정되고 짜임새 있는 구도와 구성력을 갖추었으며, 간결한 필치와 안정되고 중후한 색감, 원만한 인물의 표현 등에서도 18세기 후반의 시대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불화로 평가된다. 아울러 제작 당시의 복장유물이 온전하게 잘 남아 있어 18세기 후반 불화 복장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백양사 쌍계루와 백학봉>

백학봉

장성군 백암산에 위치한 백양사와 백학봉 일대는 백양사의 대웅전과 쌍계루에서 바라보는 백학봉 암벽과 숲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대한 8경'으로 손꼽혀왔다. 백암산은 내장산과 함께 단풍이 특히 유명하며, 천연기념물 "장성 백양사 비자나무 숲"을 비롯하여 1,500여종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백양사의 창건유래가 담긴 정도전의 「정토사교루기」와, 이색, 정몽주, 김인후, 박순, 송순 등 유명인들이 탐방하고 백학봉과 쌍계루의 풍광을 읊은 시와 기문를 볼 때 이 곳은 예로부터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명승이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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