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깊은 계곡에 있거나, 산꼭대기 암자, 그리고 산자라에 붙어 있는 산사를 떠올리곤 한다. 불교가 주류였던 삼국시대에는 중요한 사찰은 도시에 있었다. 물론 당시에 사찰도 많았고 명상을 중요시하는 선종인 경우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초기까지의 사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경우 모두 산에 위치해 있었다.
부처님은 사찰은 도시와 가까이 있어야 하며 부담 없이 지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의 승려들의 공양은 탁발에 의존했기 때문에 마을에서 먼 곳은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종교는 수행이라는 개인적인 기능도 있지만 세속과 접하여 포교하여 사회를 계몽하고 이끌어 나가야 하는 책임도 있기 때문에 고대에는 도시속이나 근처에 존재했다.
태국의 사례를 들어보면 현대에 들어와서도 태국의 승려들은 경제활동을 금지하고 있어서 모든 음식을 신도들의 공양으로만 해결한다고 한다. 만약 사찰이 정글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면 부처님을 믿고따르기에 앞서서 생사를 걱정해야 처기가 될 것이다.

사찰의 위치에 따른 구분
우리나라 사찰은 위치에 따라 평지형, 산지형, 석굴형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평지형 사찰은 예로부터 나라의 도읍지 부근에 형성됐다. 주로 왕실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는데 많은 도시인들이 자주 오가면서 불교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개성 영통사, 익산 미륵사지 등이 이런 식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패턴이었다. 널따란 토지를 소유했고 교단은 대지주 계급에 속했다.
석굴형 사찰은 천연 혹은 인공 석굴 안에 지은 절이다. 대표적인 것이 불국사 석굴암이다.
산지형 사찰이 가장 보편적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우선 탈속주의와 풍수지리설의 영향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 산악신앙이 유행하기에 알맞은 지리적 조건이다. 국토의 시원지를 백두산으로 삼았고 조상들은 산신이 나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이 강했다. 곤란에 처하거나 가뭄이 들면 산신에게 운명을 맡겼다.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불보살의 이름으로 장식된 사실에서도 산악신앙의 강렬함을 엿볼 수 있다. 세속권력과의 거리를 두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신라 말 선승의 결집을 이룬 구산선문은 말 그대로 산문(山門)이다. 수도였던 경주와 일정하게 떨어져 제도권의 귀족적 불교에 저항했다. 수행과 청빈으로 일관한 삶으로 민중의 호평을 받았다.
풍수지리학으로서 사찰의 위치
풍수지리학을 국내에 도입한 도선국사의 산천비보설(山川裨補說)은 산악신앙에 이론적 풍성함을 더했다. 산천비보설이란 기력이 쇠진한 땅에 일종의 '보약'을 먹여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일을 가리킨다. 풍수학적 관점에서 산은 살아있는 생명체다.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 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도선국사는 지형이나 지세는 국가와 개인의 길흉화복을 좌우할 만큼 매우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인체에 뜸을 놓듯이 기운을 북돋워야 할 산에 절과 탑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막강한 후견인이었던 고려 태조 왕건이 이를 충실히 실천했다.

풍수지리설로의 마곡사의 사례를 들면 공주 서쪽 유곡과 마곡사는 예로부터 전란, 흉년, 전염병 등의 삼재가 침범하지 않는 전국 10대 명당 중의 한 곳이다. 물이 태극 모양이나 S자로 흐르는 곳은 거의 명당이다. 태극 모양이면 물이 느리게 흐르면서 주변에 수기(水氣)를 충분하게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곡사 인근 지역은 변혁의 시대에 생명과 안전을 의탁하여 찾아드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신라 말 도선대사는 마곡사터가 삼재가 감히 들지 못하는 곳이며, 유구와 마곡 두 냇물 사이의 터는 능히 천명의 목숨을 구할만하다고 칭찬했다.
숭유억불 정책에 따른 사찰의 이동
사찰이 산에 주로 있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조선왕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었다. 이성계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의 집권층은 중앙집권적 체제 강화를 위해 사찰과 스님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절 땅을 몰수해 세수(稅收)를 비약적으로 증장시켰고, 승려의 대량 환속 조치로 군역을 충당할 머릿수를 대폭 늘렸다.
3대 임금 태종은 242개의 사찰만 남겨두고 모조리 없앴다. 빈털터리에 천민 대접을 받는 스님들은 백성들의 눈에 띄는 곳에 남아날 수가 없었다. 극소수의 원찰을 제외하고는 모든 절이 산 속으로 숨어들어 무속과 함께 연명했다. 그러나 기어이 살아남은 절들은 유서 깊은 기도도량으로 오늘날까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이 아닌 불교사상으로서 기반하여 자연스럽게 산으로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되는 구산선문 사찰과 '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아름다운 산천 곳곳에 위치해 있는 사찰 65개와 사찰이 소유하고 있는 불교 문화유산을 소개해드리니 아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신라 불교 사상과 구산선문(九山禪門) 사찰 탄생 배경(1)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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