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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등산 여행

100대 명산 사찰, 지리산(불일폭포)과 쌍계사

by 3000포석정 2023.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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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명산"은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하고 산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2002년 10월 산림청에서 선정 공표하였습니다. 산림청에서 선정한 "100대 명산"은 학계, 산악계, 언론계 등 13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추천받은 105개 산과 산악회 및 산악 전문지가 추천하는 산,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선호도가 높은 산을 대상을 산의 역사, 문화성, 접근성, 선호도, 규모, 생태계 특성 등 5개 항목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심사 후 선정하였습니다. 100대 명산에는 국립공원(31)ㆍ도립공원(15)ㆍ군립공원(10) 지역에서 56개가 선정되었습니다. 또 가리왕산, 운장산, 황악산 등 생태적 가치가 큰 산(16)과 역사, 문화, 경관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한 산(28)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가를 즐기기 위해 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가족과 동료, 연인과 아름다운 산을 오르기 위해 등산하는 것도 좋지만, 명산(名山)에 천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사찰이 있다면 사찰의 역사와 의미, 그리고 우리 문화유산을 같이 둘러본다면 더욱 즐거운 등산이 되지 않을까 해서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이어주는 글을 연재하고자 하오니 즐거운 산행하시기 바랍니다.
 

<불일폭포,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지리산 소재지 및 높이

-소재지 :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하동군ㆍ산청군ㆍ함양군
-산높이 : 1915.4m
 

100대 명산 선정이유

신라 5악중 남악으로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4m)을 주봉으로 노고단(1,507m), 반야봉(1,731.8m) 등 동서로 100여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이뤄 "지리산 12동천"을 형성하는 등 경관이 뛰어나고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생태계 보고이며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1967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고 한데서 산이름이 유래하며, 사찰로는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등이 유명합니다.
 

지리산 상세정보

지리산은 크다. 높고도 넓고 그리고 깊다. 3도 여섯 고을 함양, 산청, 하동, 구례, 남원, 운봉[현]에 그림자 드리운 거대한 산국(山國)이다. 1000미터 이상의 주릉만 해도 110리나 된다. 실상사 서쪽 덕두산(1151.5m)에서 천왕봉 북쪽 쑥밭재(1315.4m)까지다(도상거리 기준이며 노고단~천왕봉 줄자 실측 결과는 34.2km다). 삼남의 지붕 용마루가 된다.
 
용마루에서는 열댓 개의 내림마루가 흘러내리고 있다. 내림마루 사이에는 또 그만큼의 골짜기들이 있다. 하여 모두 1억4천만평의, 장엄한 산덩이를 이룬다. 그 안에는 10경이 있다. 노고단 운해, 피아골 단풍, 반야봉 낙조, 벽소령 명월, 세석평전 철쭉, 불일폭포, 연하천 선경(仙景), 천왕봉 일출, 칠선계곡, 섬진강 맑은 물이다.
 
최고 전망대는 왕시루봉(1240.2m)이다. 거기서 섬진강은 모래밭의 살얼음처럼 반짝이고 천왕봉은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제석봉과 촛대봉을 거느리고 내려다보고 있다. 불교문화의 보고이기도 하다. 쌍계사, 연곡사, 화엄사, 천은사, 실상사, 벽송사, 그리고 돌탑 둘만 뎅그런 단속사지다. 모두 합해 국보 일곱에 스물다섯 개의 보물을 갖고있다.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의 반열에 올라있다. 방장산, 두류산, 불복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뜻으로는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나타날 산이다.
 
명산일수록 숱한 이름속에 둘러쌓여 있기 마련이다. 예로부터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맥이 크게 끝나는 곳으로 '택리지'에서는 두류산이라고 하였으며 진시황 시절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지이산'은 '지혜가 다른 산' '천재지변을 미리 아는 지혜 있는 산'이라 표현하는 등 이름의 숱한 전설이 스며 있다.
 
「금강산은 빼어나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되 빼어나지 못하고」라는 서산대사의 비유가 있듯 지리산은 날카롭고 빼어남은 부족하나 웅장하고 두리뭉실한 기운이 돋보인다. 행정구역상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山 208번지에 소재한 천왕봉(1,915.4m)을 주봉으로 반야봉(1,731.8m), 노고단(1,507m)이 대표적이며, 천왕봉에서 노고단을 잇는 100리 능선에는 1천 5백미터가 넘는 고봉이 10개, 1천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나 있을 정도로 높고 크다. 평평한 고원지대도 많이 발달해 야생화나 철쭉 등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산세가 험하지 않으면서 봉우리가 80개에 달하다보니 봉우리 사이로 계곡이 발달했다.
 
계곡물이 많고 경사도가 심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중산리계곡, 대원사계곡, 거림계곡, 장당계곡, 뱀사골계곡, 화엄사계곡, 심원계곡, 피아골계곡, 한신(백무동)계곡, 칠선계곡 등 유명 계곡만도 20여개가 있다.
 

 

지리산(불일폭포) 등산코스

지리산 10경의 하나인 불일폭포를 만나러 가는 길, 불일폭포 탐방코스

불일폭포 코스

쌍계사에서 불일폭포를 왕복하는 탐방 코스(2.4km 정도 거리, 1시간 30분쯤/왕복 약4.8km, 3시간 소요)
완만한 경사와 시원하게 뻗은 숲길로 누구나 탐방 가능한 코스
 
불일폭포 탐방 코스는 언제 와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봄엔 탐방로 곳곳에 핀 야생화들이 발걸음을 붙들고,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이루는 숲길이 더위를 식혀주고, 가을엔 색색이 물든 단풍이 피로를 씻겨준다. 특히 탐방로의 목적지인 불일폭포의 모습이 아주 장관이다. 또한 4월 중순의 화개장터 벚꽃축제와 5월 초순의 하동야생차 문화축제가 열려 이즈음에 온다면 멋진 축제를 즐길 수 있다. 화개장터~쌍계사의 환상적인 십리벚꽃길을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우리나라 차시배지인 화개에서 나온 맛과 향이 뛰어난 차를 맛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불일폭포 지명의 유래로는 이 폭포아래 용소에 살던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살짝 쳐서 청학봉, 백학봉을 만들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높이가 60m로서 장엄하고 아름다운 폭포다.
고려 희종(1204~1211년) 때 보조국사 지눌이 이 폭포 근처에서 수도하였는데 입적 하신 후 희종은 시호를 "불일보고"라 내렸다. 그 시호를 따서 불일폭포라 하였으며, 지눌이 수도하던 암자를 불일암이라 불렀다.
 
쌍계사탐방지원센터~환학대 구간(1.2km, 40분)
쌍계사 경내에 들어서면 ‘불일폭포 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붙어 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면 국사암 삼거리 (0.4km 지점)까지는 계단 높이가 높은 돌계단길이다. 이 탐방로의 절반 지점인 환학대(1.2km 지점)까지는 약40분 정도가 소요되며, 비교적 원만한 흙길과 돌길, 그리고 나무다리로 이루어져 있어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환학대~마족길 구간(1.6km, 10~15분)
환학대에서 마족대(1.6km 지점)까지는 약 10~15분 정도 걸리는 길로 조금 가파른 돌길(돌계단길)과 나무다리가 있다. 마족대에서 불일탐방지원센터(불일평전, 2km)까지는 10~15분 정도 소요되는 원만한 돌길과 흙길로 편안한 편이다.
 
불일탐방지원센터~불일암 구간(2.2km, 10분)
불일탐방지원센터에서 불일암(2.2km)까지는 1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흙길, 나무다리 및 계단, 급경사 돌길 등으로 이어져 있다. 대체로 걷기 좋은 평평한 길이지만, 불일암 못 미처 한 차례 경사가 심한 난코스가 있다. 불일암에서 불일전망대(2.4km)까지의 구간은 짧은 흙길을 지나면 대부분 나무계단 길이다. 계단의 높이가 꽤 높은 부분도 있어 오르고 내릴 때 조금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쌍계사 역사와 유래

쌍계사는 통일신라 724(성덕왕23)년에 삼법과 대비 두 화상이 육조혜능조사(六祖慧能祖師)의 정상頂相(두상頭上)을 봉안하고 작은 움막을 세운 것이 그 시초이다. 삼법화상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쌍계사의 개산과 창건에 관련된 여러 기록들이 있다. 이를 정리하여 그의 생애와 쌍계사 개산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법화상의 출생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661(문무왕 1)년경에 태어나 739(효성왕 3)년에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76(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으며 너무도 총명하여 경장과 율장을 통달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육조혜능조사께서 크게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가서 도를 묻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4(성덕왕13년)에 육조혜능조사가입적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6년이 지난 뒤 금마국(⾦⾺國) 미륵사(彌勒寺)의 주창(主晶)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육조혜능조사의 설법집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읽던 중에 육조혜능선사가 이르기를, "내가 입적한 뒤 70년이 지나서 유이보살(有⼆菩薩)이 종동방래(從東⽅來)하리니, 동방에서 두명의 보살이 와서 동토유연지국토(東⼟有緣之國⼟)에 가서 불법을 널리 홍포하리라."는 대목을 읽다가, "내가 마땅히 힘껏 도모하여서 우리나라에 만대(萬代)의 복전(福⽥)을 지으리라."고 생각하고 이에 김유신의 부인이었던 법정비구니에게 2만금을 빌려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서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 가서 머물렀다. 그곳에는 신라 백율사(栢栗寺)의 대비선백(⼤悲禪伯)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의논하던 중, 이 절에 기거하던 장정만(張淨滿)에게 2만금을 주고 육조혜능조사의 정상頂相(두상)을 취하여 오게 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법정비구니가 머무는 영묘사(靈妙寺)에서 밤마다 육조의 정상에 공양을 올렸다. 그러던 중 한 스님이 꿈에 나타나, 자신의 인연 터가 지리산 아래 눈속에 등나무꽃이 핀 곳이니 그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비선백과 함께 눈덮힌 지리산을 헤매다가 12월인데도 따뜻하기가 봄과 같고 등꽃이 만발한 곳이 있어 이곳에 돌을 쪼아서 함을 만들고 깊이 봉안한 뒤 조그마한 움막 속에서 선정 닦기에 힘썼다. 18년 동안 이곳에서 수행하다가 739년 7월 12일에 목욕하고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염송하다 앉아서 입적하였다. 문인들이 유체를 받들어 운암사(雲巖寺)에 유장하였다. 이와 같이 쌍계사의 개산은 삼법과 대비화상이 육조혜능조사의 정상을 봉안한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쌍계사 불교 문화유산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좌)와 쌍계사 승탑(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진감선사탑비(국보)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쌍계사 승탑(보물)
쌍계사는 성덕왕 23년(723) 의상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한 절이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쌓인 계곡 위의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었다. 귀국 후 눈 위에 꽃이 피는 땅을 두루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지리산에 이르렀다. 그 때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 자리에 도착하였다. 그 곳이 꿈에서 계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옥천사라는 절을 세웠는데 그후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린 것을 벽암(碧巖)이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 북쪽 탑봉우리 능선에 위치한 이 탑은 진감선사(眞鑑禪師)의 승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고 위는 머리장식부분이다. 기단은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8각의 가운데받침돌을 올렸다. 그 위로 다시 솟은 연꽃무늬를 새긴 윗받침돌을 올려 대칭적으로 표현하였다.
 

<쌍계사 대웅전(좌)과 팔상전 영산회상동(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대웅전(보물)
쌍계사는 언제 세웠는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15년(1739)에 세운 비가 남아있어 그 당시 절을 고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절의 중심 법당이라 할 수 있는 대웅전은 건축 형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물로 1972년 보수공사가 있었고 1973년에 단청을 다시 하였다. 정면의 문은 앞면 5칸을 모두 같은 간격으로 2짝씩 달아 문살에 화려한 꽃새김을 하고 있다. 꽃무늬는 연꽃, 모란을 비롯해 6가지 무늬로 새겨 색을 칠하였는데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으며,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신 불단 위쪽으로 불상마다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엄숙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예술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을 볼 수 있고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한 내용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크기는 길이 410㎝, 폭 273㎝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사천왕상, 여러 보살, 제자 등의 무리가 석가불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중앙에 앉아 있으며 얼굴은 둥글고 이목구비는 작으며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하다. 사천왕상과 여러 보살, 제자들의 모습은 석가불처럼 당당한 모습니다. 색채는 밝고 부드러운 중간색을 주로 사용하였다. 조선 숙종 7년(1681)에 그려진 이 불화는 비교적 큰 편이지만 짜임새 있는 구도를 보여주고 공간의 처리방법과 회화기법 등 이 매우 뛰어나며 17세기 중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아래 쌍계사에 관한 블로그 글을 보면 더 많은 불교 문화유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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