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국보와 보물)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범어사 역사와 유래
범어사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구 청룡동) 금정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이다.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사찰로 불리운다. 2012년 11월 사부대중의 수행정진과 화합을 바탕으로 지유대종사를 초대 방장으로 모시고 총림으로 지정되었다.
신라 문무왕 18년(678년), 의상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창건하였다. 전국 사찰중에서 유일하게 국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소장하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판본 중 하나로 권4의 5편에 들어 있는 '의상전교(義湘傳敎)'에는 의상대사가 열 곳의 절에 교를 전하게 해 화엄십찰을 창건하는 내용이 나오고, 이 가운데 '금정지범어(金井之梵魚)' 즉 금정산 범어사가 들어있음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금빛 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해서 산 이름이 금정산(金井山)이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를 건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엄경의 이상향인 맑고 청정하여 서로 돕고 이해하고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설립된 사찰로 범어사는 역사적으로 많은 고승대덕을 길러내고 선승을 배출한 수행사찰로 오랜 전통과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의상대사를 비롯해 원효대사ㆍ표훈대덕ㆍ낭백선사ㆍ명학스님과 그 대에 경허선사ㆍ용성선사ㆍ성월선사ㆍ만해 한용운선사ㆍ동산선사 등 고승들이 수행 정진하여 명실상부한 한국의 명찰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범어사 설화
낙안 스님은 흔히낭백수좌(浪伯首座) 혹은 만행수좌(萬行首座)라고 불린다. 일찍이 범어사에 출가하여 부지런히 수행하였으며, 특히 보시행을 발원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남을 위하여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스님에게 특기할 만한 일은 커다란 원력을 세워서 생을 거듭하면서까지 그 원력을 이룩한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하여 지고 있다.
이 나라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융성하던 불교가 쇠망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이 빚은 불교의 폐해는 필설로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불교의 박해는 그 극에 달하는데, 승려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일개 사찰에 부여된 부역의 수가 무려 30종에서 40종에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이 전한다. 종이, 붓, 노끈, 짚신, 새끼, 지게 등 그리고 특수 곡물 등 온갖 농작물에 이르기까지 범어사에 철마다 부여된 부역의 수만도 36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무렵의 승려들은 자신들의 공부는 전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일생을 나라에서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기도 바쁜 나날이었다.
낭백 스님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시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부역만은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설사 금생에 안되면 내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마음먹고 원력을 세웠다.
"금생에는 복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리라. 그리고 그 관리의 특권으로 범어사 스님들의 부역을 혁파하리라." 하고 그 날부터 힘이 닿는 대로 복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기찰 부근 그러니까 동래를 들어가고 나가는 길목 큰 소나무 밑에 샘물을 파서 행인들의 식수를 제공하고, 넓은 밭을 개간하여 참외, 오이, 수박 등을 심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무한정 보시하였으며, 그런 여가에 짚신을 삼아서 모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신을 보시하는 등 온갖 일로써 많은 사람을 구제하시다가 마지막 늙은 몸뚱이까지도 보시하고자 돌아가실 때에는 범어사 뒷산 밀림 속에서 삼일동안 헤매다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히는 바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스스로 숙명통(宿命通)을 못하였으므로 세 가지의 증명할 일을 남겨 놓기로 하였다.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어 올 때에는 모든 관리가 다 일주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데 자신은 어산교 앞에서 내리겠으며, 자신이 쓰던 방을 봉해 두었다가 스님 스스로가 열 것이며, 사찰의 어려움을 물어서 해결할 것을 약속하리라 라는 것이었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비슷한 연배의 스님들도 다 돌아가시고, 그 제자되는 스님들도 이미 늙었으나 낭백 스님의 그 눈물겨운 원력이 성취될 날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 날, 중앙의 순상국(巡相國)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내는 관리가 온다는 전갈을 받고 범어사 스님들은 언제나 지방관리가 와도 그러했듯이 주지스님 이하 모든 대중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부복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 관리는 반드시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가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찰을 자세히 돌아본 뒤 수 십 년 동안 봉해둔 낭백 스님의 방 앞에 와서는 기어이 문을 열라하여 봉함을 뜯고 열어보니, 개문자시폐문인(開門者是閉門人)이란 스님의 친필유묵이 몇 십년의 세월 속에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지 스님의 차대접을 받으면서 사찰의 어려움을 묻고 36종의 부역을 혁파해 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서 그 즉시 동래부사에게 명하여 시행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 증거로써 지금 어산교에서 500∼600m 정도를 아래로 내려가면 옛날에 사용하던 길옆에 몇 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 중에서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嚴革祛寺弊永世不忘壇)'이라는 비가 그것이다.
순상국 조공은 스스로 낭백 스님의 후신이라고 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분은 낭백 스님의 원력을 성취시킨 사람이므로 낭백 스님의 환생임에 틀림없다.
범어사 문화유산
종목 | 명칭 | 시대명 |
보물 | 부산 범어사 삼층석탑 | 통일신라 |
보물 | 부산 범어사 대웅전 | 조선시대 |
보물 | 부산 범어사 조계문 | 조선시대 |
보물 | 부산 범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 조선시대 |
▶삼층석탑
범어사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이 탑의 특징은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에서 찾을 수 있는데, 위ㆍ아래층 기단의 옆면을 기둥 모양으로 장식하지 않고 대신 안상(眼象)을 큼직하게 조각한 것이다. 탑신부는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평평하고 얇은 지붕돌은 처마가 수평을 이루며, 밑면의 받침이 4단으로 되어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 위에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만 남아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어졌다.
통일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때에 세운 탑으로, 일제시대에 크게 수리를 할 때 기단 아래부분에 돌 하나를 첨가하는 바람에 기단부가 너무 크고 높은 느낌을 준다. 밑에 둘러진 난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웅전
경상남도 3대 절 중 하나로 유명한 범어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통일신라 문무왕 18년(678)에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 일본인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의 승려들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싸우기도 했던 중요한 곳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1993년 문화재연구소 정밀실측 중 대웅전 종도리 묵서명에서 효종 9년(1658) 상량식을 거행한 내용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대웅전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02년 당시 현감이 임시 복구하였으며 1658년 효종 9년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암막새 명문과 기단 각자, 목부재 기록 등으로 볼 때 현재 대웅전은 17세기에 중건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석가모니불상만을 모시는 일반 대웅전과는 달리 이곳 범어사 대웅전에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을 각각 석가모니의 왼쪽과 오른쪽에 함께 모시고 있다.
앞면ㆍ옆면 3칸 크기를 가진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 불상을 올려놓는 자리인 불단과 불상을 장식하는 지붕 모형의 닫집에서 보이는 조각의 정교함과 섬세함은, 조선 중기 불교건축의 아름다움과 조선시대 목조공예의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조계문
이 건물을 세운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조선 광해군 6년(1614)에 묘전화상이 절내 여러 건물을 고쳐 지을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추측한다. 정조 5년(1781)에 백암선사가 현재의 건물로 보수했다. 앞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은 높은 돌 위에 짧은 기둥을 세운 것이 특이하며 모든 나무재료들은 단청을 하였다.
부산 범어사 조계문은 모든 법이 하나로 통한다는 법리를 담고 있어 삼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부산 범어사 조계문은 사찰의 일주문이 가지는 기능적인 건물로서의 가치와 함께 모든 구성 부재들의 적절한 배치와 결구를 통한 구조적인 합리성 등이 시각적으로 안정된 조형 및 의장성을 돋보이게 한다. 한국전통 건축의 구조미를 잘 표현하여 우리나라 일주문 중에서 걸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이 삼존좌상은 범어사 대웅전의 주불로서 개금시(改金時) 복장에서 발견된 불상기문(佛像記文)과 불상기인발원축(佛像記因發願祝)을 통하여 석가불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의 수기삼존불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순치 18년(조선 현종 2년, 1661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와 수두(首頭) 희장(熙莊)을 비롯한 보해(寶海), 경신(敬信), 쌍묵(雙黙), 뇌영(雷影), 신학(信學), 청언(淸彦) 등이 조각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범어사 대웅전 불상은 희장이 완숙기에 조성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전하는 자료를 통해 그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17세기 중ㆍ후반기의 대표적인 조각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삼존불은 비례가 적당하여 당당하고 균형 잡힌 형태를 보이며, 상호(相好)는 풍만한 양감 속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우러져 자비롭고 단정 우아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범어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은 불상기문을 통하여 정확한 존상명칭은 물론, 조성시기와 조각가 그룹을 알 수 있는 불상으로서는 매우 완성도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100대 명산, 금정산과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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