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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양산(영축산) 통도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38)-국보와 보물

by 3000포석정 2023.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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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국보와 보물)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통도사 '사찰의 역사와 유래' 및 '금강계단 역사와 의미'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양산(영축산) 통도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38) - 금강계단

 

통도사 문화유산(국보와 보물)

종목 명칭 시대명
국보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조선시대
보물 사인비구 제작 동종-통도사 동종 조선시대
보물 양산 통도사 국장생 석표 고려시대
보물 양산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 고려시대
보물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1963) 고려시대
보물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2002) 조선시대
보물 양산 통도사 영산전 조선시대
보물 양산 통도사 영산전 벽화 조선시대
보물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 조선시대
보물 양산 통도사 봉발탑 고려시대
보물 양산 통도사 대광명전 조선시대
보물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도 조선시대
보물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 조선시대
보물 통도사 괘불탱 조선시대
보물 통도사 화엄탱 조선시대
보물 통도사 영산회상탱 조선시대
보물 양산 통도사 금동천문도 조선시대
보물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보물 통도사 아미타여래설법도 조선시대
보물 양산 통도사 청동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조선시대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좌), 사인비구 제작 통도사 동종(가운데), 국장생 석표(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대웅전 및 금강계단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은 것이다.

불가에서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지금 있는 금강계단은 고려ㆍ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다. 양식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금강계단 형태를 띠고 있는데, 가운데에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설치하여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1층 기단 안쪽 면에는 천인상을 조각하고 바깥쪽 면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제석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지은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인 대웅전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금강계단은 각각 건축 구조와 건축사 연구, 계단(戒壇)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사인비구 제작 동종-통도사 동종

이 종은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조선 숙종12년(1686)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유일하게 8괘(八卦) 문양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큰 종으로 형태미가 뛰어날 뿐 아니라, 종 몸통에 있는 사각형의 연곽안에 9개의 돌기를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종은 중앙에 단 한 개의 돌기만 새겨 둔 점에서 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국장생 석표

통도사를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놓은 장생표의 하나로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이며, 절의 동남쪽 약 4㎞지점에 서 있다. 국장생이라는 명칭은 나라의 명에 의해 건립된 장생이라는 의미로, 거친 자연석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장생은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 등의 구실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설과 함께 민속신앙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장생은 경계표와 보호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선종 2년(1085)에 제작된 것으로, 나라의 통첩을 받아 세웠다는 내용이 이두문이 섞인 금석문으로 새겨져 있어 국가와 사찰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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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청동은입사 향완(좌), 청동은입사 향완(1963)-가운데, 청동은입사 향완(2002)-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청동은입사 향완

고배형 향완이란 구연이 밖으로 벌어져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아래로 가면서 나팔형으로 벌어진 받침으로 구성된 형식으로서 대부분이 몸체와 다리 부분을 따로 주조하여 결합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향로는 명문에 보이듯 특별히 ‘향완’이라 명칭하고 기록하였음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고배형 향완은 대부분 노부(爐部)와 대부(臺部)를 별도로 주조하여 결합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향로 역시 노부 받침의 내면 중앙에 그러한 연결부를 볼 수 있다.

제작연대는 14세기 중엽에서 후반 쯤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작품인 국립박물관 소장 청곡사(靑谷寺) 향완(1397)과 비교해 보아도 그와는 다른 고려적인 요소가 대부분 잔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전기의 향완이라고 알려져 왔던 지금까지의 견해와 달리 이 통도사 소장 향완은 앞서와 같은 고려 후기 향완을 충실히 계승한 작품으로 새롭게 파악될 수 있으며 보존상태 또한 매우 양호하다.

 

청동은입사 향완(1963)

절에서 의식을 행하거나 불단 위에 올려놓고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공양구이다. 특히 밥 그릇 모양의 몸체 아래 나팔형으로 벌어져 원반형의 받침을 지닌 것을 향완이라 하였다.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은 높이 33㎝, 입지름 30㎝, 받침대 지름 24.7㎝로서 전면에 굵고 가는 은ㆍ금실을 이용하여 연꽃무늬, 덩굴무늬, 봉황, 구름무늬로 가득차게 은입사하였다.

특히 몸통의 덩굴무늬 사이를 은판으로 채운 것은 이 향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받침대는 3단으로 되어 있으며 윗쪽은 연꽃무늬, 아래쪽은 덩굴무늬, 중앙은 넓은 공간에 구름문과 봉황이 굵고 가는 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입 주위의 넓은 테인 전의 일부가 약간 휘어진 것이 흠이지만, 외형상 그 형태가 안정감있다. 전면에 새긴 무늬가 매우 복잡하면서도 도식적으로 변모된 점으로 미루어 고려 후기의 제작으로 추정된다.

 

청동은입사 향완(2002)

국내에 전해져 오는 고려ㆍ조선시대 고배형 청동은입사향완(高杯形靑銅銀入絲香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넓은 테두리(口緣部)가 둘러진 완형(盌形)의 몸체(身部)에 나팔모양의 다리(臺部)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배형의 향완이다.

원반 모양의 대받침이 구비되어 있는 대부는 윗 부분에 긴 네모꼴의 복판(覆瓣) 연화문을 장식하고, 아랫 부분에는 두 날개를 활짝 편 채 구름 속을 날고 있는 봉황 한 쌍을 대칭되게 배치해 놓았다. 향완의 뒷면에 음각된 명문에는 1674년(강희 13년) 신애남(辛愛南)이 만들었음을 기록하였다. 고려시대 고배형 청동은입사향완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향완으로서 현존 유례가 많지 않은 조선시대 고배형 향완 가운데 조성시기와 주성장인ㆍ봉안사찰이 명확하게 밝혀진 명문이 남아있는 중요한 예이다.

 

 

 

 

통도사 영산전

영산전은 통도사 하로전(下爐殿)의 중심 건물로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전면의 좌우에는 극락전과 약사전이 놓여 있다. 영산전은 벽화가 매우 주목되는데 내부벽화로는 다보탑을 회화작품으로 표현한 '견보탑벽화'가있으며, 이 벽화는『법화경』「견보탑품」을 도해한 변상도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도 뛰어난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더불어 대들보에 매우 화려하게 자리한 황룡, 청룡그림 그리고 양류관음과 나한, 산수를 표현한 벽화들 그리고 이러한 화려한 장엄 속에 석가모니불,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전은 건축물 용도에 따른 불단 배치 및 벽화를 구성하기 위한 벽면구성, 반자의 구성 등에서 특징적이며, 상부가구와 공포형식 또한 18세기 초 불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불교 건축사와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가치가 충분하다.

 

영산전 벽화

영산전 벽화는 벽체와 포벽은 물론 내목도리 윗벽과 대량ㆍ창방 등 내ㆍ외부 전체에 고루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 또한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어 조선후기 사찰벽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외벽에는 총 17점의 벽화가 남아 있으나 현재 훼손이 심한 편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부는 총 52면의 벽면에 벽화가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벽에 묘사된 『묘법연화경』 「견보탑품」의 내용은 3면으로 분할되어 있으나 하나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므로 한 장면으로 볼 경우 총 50장면의 벽화가 도상화되어 있다. 이 가운데 『묘법연화경』 「견보탑품」의 내용과 불상 뒷벽의 상단에 그려진 운룡도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하는 것은 48면에 그려진 『석씨원류응화사적』의 내용을 표현한 벽화들이다.

영산전 내벽에 그려진 '법화경 견보탑품'벽화는 국내유일의 견보탑품 벽화라는데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있다. '석씨원류응화사적' 벽화 역시 조선후기 팔상도에 포함된 '석씨원류응화사적' 목판의 설화내용 보다 비교적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 '팔상도'의 부족한 도해 내용을 보완해 주고 있다는 데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화면마다 화제를 남기고 있어 벽화의 도상 이해 제고에 자료적 가치를 더 해준다.

또한 영산전 내부벽화는 1716년에 쓰여진「영산전천왕문양중창겸단확기문」이나 여타 중창관련 자료들을 통해서도, 1713년 화재로 영산전이 소실된 이후 1714년부터 1716년에 걸쳐 이루어진 일련의 중창불사 과정에서 이 벽화도 그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벽화는 분명한 소의경전과 예술적 작품성, 종교적 감수성, 시대성 등을 두루 갖춘 18세기 초 벽화의 기준자료이자 이 시기 벽화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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