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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하동(지리산) 쌍계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35)

by 3000포석정 2023.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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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쌍계사 역사와 유래

쌍계사는 통일신라 724(성덕왕23)년에 삼법과 대비 두 화상이 육조혜능조사(六祖慧能祖師)의 정상頂相(두상頭上)을 봉안하고 작은 움막을 세운 것이 그 시초이다. 삼법화상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쌍계사의 개산과 창건에 관련된 여러 기록들이 있다. 이를 정리하여 그의 생애와 쌍계사 개산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법화상의 출생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661(문무왕 1)년경에 태어나 739(효성왕 3)년에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76(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으며 너무도 총명하여 경장과 율장을 통달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육조혜능조사께서 크게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가서 도를 묻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4(성덕왕13년)에 육조혜능조사가입적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6년이 지난 뒤 금마국(⾦⾺國) 미륵사(彌勒寺)의 주창(主晶)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육조혜능조사의 설법집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읽던 중에 육조혜능선사가 이르기를, "내가 입적한 뒤 70년이 지나서 유이보살(有⼆菩薩)이 종동방래(從東⽅來)하리니, 동방에서 두명의 보살이 와서 동토유연지국토(東⼟有緣之國⼟)에 가서 불법을 널리 홍포하리라."는 대목을 읽다가, "내가 마땅히 힘껏 도모하여서 우리나라에 만대(萬代)의 복전(福⽥)을 지으리라."고 생각하고 이에 김유신의 부인이었던 법정비구니에게 2만금을 빌려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서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 가서 머물렀다. 그곳에는 신라 백율사(栢栗寺)의 대비선백(⼤悲禪伯)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의논하던 중, 이 절에 기거하던 장정만(張淨滿)에게 2만금을 주고 육조혜능조사의 정상頂相(두상)을 취하여 오게 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법정비구니가 머무는 영묘사(靈妙寺)에서 밤마다 육조의 정상에 공양을 올렸다. 그러던 중 한 스님이 꿈에 나타나, 자신의 인연 터가 지리산 아래 눈속에 등나무꽃이 핀 곳이니 그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비선백과 함께 눈덮힌 지리산을 헤매다가 12월인데도 따뜻하기가 봄과 같고 등꽃이 만발한 곳이 있어 이곳에 돌을 쪼아서 함을 만들고 깊이 봉안한 뒤 조그마한 움막 속에서 선정 닦기에 힘썼다. 18년 동안 이곳에서 수행하다가 739년 7월 12일에 목욕하고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염송하다 앉아서 입적하였다. 문인들이 유체를 받들어 운암사(雲巖寺)에 유장하였다. 이와 같이 쌍계사의 개산은 삼법과 대비화상이 육조혜능조사의 정상을 봉안한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쌍계사 문화유산

종목 명칭 시대명
국보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통일신라
보물 하동 쌍계사 승탑 통일신라
보물 하동 쌍계사 대웅전 조선시대
보물 쌍계사 팔상전 영산회상도 조선시대
보물 쌍계사 대웅전 삼세불탱 조선시대
보물 쌍계사 팔상전 팔상탱 조선시대
보물 하동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조선시대
보물 하동 쌍계사 괘불도 조선시대
보물 하동 쌍계사 감로왕도 조선시대
보물 하동 쌍계사 동종 조선시대
명승 지리산 쌍계사와 불일폭포 일원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좌), 승탑(가운데), 대웅전(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진감선사탑비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승탑

쌍계사는 성덕왕 23년(723) 의상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한 절이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쌓인 계곡 위의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었다. 귀국 후 눈 위에 꽃이 피는 땅을 두루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지리산에 이르렀다. 그 때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 자리에 도착하였다. 그 곳이 꿈에서 계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옥천사라는 절을 세웠는데 그후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린 것을 벽암(碧巖)이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 북쪽 탑봉우리 능선에 위치한 이 탑은 진감선사(眞鑑禪師)의 승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고 위는 머리장식부분이다. 기단은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8각의 가운데받침돌을 올렸다. 그 위로 다시 솟은 연꽃무늬를 새긴 윗받침돌을 올려 대칭적으로 표현하였다.

 

대웅전

쌍계사는 언제 세웠는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15년(1739)에 세운 비가 남아있어 그 당시 절을 고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절의 중심 법당이라 할 수 있는 대웅전은 건축 형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물로 1972년 보수공사가 있었고 1973년에 단청을 다시 하였다.

정면의 문은 앞면 5칸을 모두 같은 간격으로 2짝씩 달아 문살에 화려한 꽃새김을 하고 있다. 꽃무늬는 연꽃, 모란을 비롯해 6가지 무늬로 새겨 색을 칠하였는데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으며,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신 불단 위쪽으로 불상마다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엄숙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예술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을 볼 수 있고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쌍계사 팔상전 영산회상도(좌), 삼세불탱(가운데), 팔상탱(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산회상도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한 내용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크기는 길이 410㎝, 폭 273㎝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사천왕상, 여러 보살, 제자 등의 무리가 석가불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중앙에 앉아 있으며 얼굴은 둥글고 이목구비는 작으며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하다. 사천왕상과 여러 보살, 제자들의 모습은 석가불처럼 당당한 모습니다. 색채는 밝고 부드러운 중간색을 주로 사용하였다. 조선 숙종 7년(1681)에 그려진 이 불화는 비교적 큰 편이지만 짜임새 있는 구도를 보여주고 공간의 처리방법과 회화기법 등 이 매우 뛰어나며 17세기 중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삼세불탱

쌍계사 대웅전(보물)에 보존되어 있는 그림으로, 중앙의 석가모니불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약사불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도를 배치한 삼세불탱화이다. 이 삼세불도는 18세기 전반 전라도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대표적 불화승 '의겸'으로부터 1780년대의 '승윤' '평삼'으로 이어지는 불화승의 계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완전한 형태를 갖춘 18세기 후반의 대형불화로서 비교적 정교한 필치와 화려하면서도 은은함을 보여주어 화풍파악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팔상탱

쌍계사 팔상전(경상남도유형문화재)에 모셔져 있는 불화로, 석가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팔상탱이다. 현존하는 석가팔상도 가운데 예천용문사팔상탱(1709년)에 이어 비교적 제작시기가 빠른 편에 속하며 공간감과 색채의 조화 등 그에 상응하는 화풍상의 특징도 보여주고 있다. 여유로운 경물의 배치와 함께 일반회화에서 볼 수 있는 수목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기법 또한 18세기 전반의 팔상도나 감로왕도 등에서 종종 보여지고 있어, 당시 또는 앞선 시기 일반회화와의 관계까지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는 데 자료적 가치가 있다.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좌), 괘불도(가운데), 감로왕도(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목조석가여래삼좌상 및 사보살입상

하동 쌍계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삼세불좌상 중 아미타불을 제외한 석가모니불과 약사불, 그리고 일광ㆍ월광ㆍ관음ㆍ세지보살로 추정되는 네 보살입상이다. 중앙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불은 본존불로서 삼불상 중 가장 크고 건장한 신체에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되어 보인다.

정면을 향하여 본존불의 오른쪽에 모셔져 있는 약사불은 굽어보는 듯한 자세와 머리 모양, 얼굴 표정, 짧아진 목과 당당한 어깨, 넓은 무릎, 사실성 넘쳐나는 손의 표현, 밋밋한 듯 부피감이 있는 신체 등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석가모니불에 비하여 크기가 다소 작아지고 아미타인(阿彌陀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얼굴과 귀가 약간 길어지고 변화된 옷 입는 방식과 보다 복잡해진 옷주름 등만이 다를 뿐이다.

사보살입상은 약사불과 아미타불 좌ㆍ우에 서 있는 네 구의 보살입상으로 일광ㆍ월광보살상과 관음ㆍ세지보살상으로 추정된다. 네 구의 상 모두 배를 앞으로 약간 내민 듯한 S자 모양의 늘씬한 체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귀걸이ㆍ목걸이ㆍ팔찌 등의 장식을 하였다. 약사불의 양 옆에 있는 일광ㆍ월광보살상은 보관 중앙에 해와 달 모양이 표현되어 있으며, 왼손을 어깨 위로 들고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한편 아미타불의 양 옆에 있는 관음ㆍ세지보살상은 오른손을 어깨 위로 들고 왼손을 아래로 내렸는데, 각각 연꽃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다. 양어깨를 모두 덮고 있는 천의 자락, 양 손ㆍ발 등의 조각 수법이 매우 자연스럽고 사실적이어서 석가모니불 및 약사불상과 함께 작품성이 뛰어나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조성기에 의하면, 조선 인조 17년(1639)에 청헌(淸憲)비구를 비롯한 11명의 화승들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쌍계사 목조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은 조선시대 17세기 전반 경의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괘불도

쌍계사 괘불도는 조성 당시의 화기는 남아 있지 않고, 1929년 괘불을 중수한 후 기록한 화기만이 남아 있다. 1929년 기록한 화기에 기재된 조성 당시의 내용은 가경4년(1799)이라는 조성년대만이 확인된다. 따라서 쌍계사 괘불도를 조성한 화승이나 표현된 여래의 존명 등을 알 수는 없다.

쌍계사 괘불도는 화면 총길이 1295.6cm, 화면 폭 589cm로 괘불도 중에서도 거대한 크기의 불화이다. 화면의 바탕천은 35~37cm 정도의 삼베 19포를 이어 제작하였다. 현재 쌍계사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이며, 화면의 상태는 화면 꺾임으로 인한 안료의 박락이 있지만 다른 괘불도에 비해 적은 편이며, 오염도도 적어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감로왕도

이 불화는 구성상 구름을 경계로 2단으로 크게 구분되며, 상단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불보살이 표현되어 있고, 하단에는 제단을 중심으로 의례장면, 쌍아귀, 망자 등이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상단 향우측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대세지보살과 목건련존자, 아난존자가 무리지어 있으며, 그 앞에는 칠여래 그리고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4여래와 3보살, 번을 들고 있는 비증보살과 인로왕보살 등이 무리지어 있다. 특히 번을 든 비증보살 위에는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벽련대반이 표현되어 있다.

쌍계사 감로왕도는 화면의 윗부분에 칠여래에 덧보태어 다수의 불ㆍ보살이 등장하는 감로왕도 도상의 선구적 위치에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더욱이 이 그림은 화면 구성 뿐 만 아니라 채색이 안정된, 화질이 뛰어난 감로왕도이다.

 

 

 

<쌍계사 동종(좌)과 불일폭포(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동종

현재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작품은 전체높이가 94cm이고, 입지름이 62cm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동종 가운데 그 규모가 대형에 속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검은 빛이 감도는 쌍계사 동종은 둥글고 높게 솟은 천판위에 단룡과 음통을 갖춘 종뉴가 있으며, 천판 아래로 승형의 입상화문대를 촘촘하게 표현하였다.

이 범종은 임진과 병자의 양란을 겪고 난 후 새로운 조선 후기 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면서도 그 크기가 큰 편에 속한다. 특히 단정한 주조기술과 문양이 돋보이면서도 조선 후기 전통형 범종을 고수하고 있는 1641년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품인 점과 17세기 승려 장인 사회를 연구하는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

 

명승-지리산 쌍계사와 불일폭포 일원

지리산 쌍계사와 불일폭포 일원은 과거부터 다양한 문헌에 등장하는 저명한 명승지로, 옛 문인묵객들이 풍경을 감상하고 수많은 여행기, 시문 등을 남겨 예찬한 장소로 역사적, 경관적 가치가 우수함. 특히, 지리산 10경 중 하나인 불일폭포는 약 60m 높이의 거대한 폭포로 다양한 식생과 기암괴석, 계곡이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불일암에서 조망하는 지리산의 전경은 빼어난 비경을 보여줌.

쌍계사에서 불일폭포에 이르는 산중은 통일신라 진감선사 유적과 쌍계석문(雙磎石文 : 쌍계사 입구 바위에 새긴 최치원의 글씨) 등 최치원의 행적이 현존하고, 신선사상의 전형적 공간인 청학동의 장소로 알려져 있음. 지리산 수림과 더불어 스님들이 왕래하던 옛길과 불일암(佛日庵), 국사암(國師庵), 환학대(喚鶴臺 : 최치원이 청학동에 산다는 학을 불러들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 완폭대 각석(翫瀑臺 刻石: 불일폭포를 조망하기 위한 완폭대임을 알려주는 각석) 등 옛 명승 자원이 유존하는 등 학술적 가치가 큼.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100대 명산, 지리산과 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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