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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양산(천성산) 내원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39)

by 3000포석정 2023.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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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국보와 보물)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원사 역사와 유래

내원사는 통도사의 말사로써 수려한 산수와 6Km에 달하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제 2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천성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1300여년전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성사께서 창건하신 절이다. 1898년 석담유성(石潭有性)선사가 설우(雪牛), 퇴운(退雲), 완해(玩海)등과 더불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여 절이름을 내원사로 개칭하고 동국제일선원이라 명명한 후 선찰로써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경허선사의 법제자인 혜월선사께서 조실로 주석하시면서 운봉, 향곡선사등 한국 선종사의 선맥을 잇는 명안종사를 배출한 도량이다. 6ㆍ25사변으로 사원이 전소되자, 비구니 수옥스님의 원력으로 10년만에 독립된 비구니 선원으로써 새롭게 중창되었다. 그 후 만공스님의 법제자인 법희, 선경스님등 납자들의 정진처가 되었다. 1979년 도용스님을 입승으로 모시고 18명의 스님들이 모여 삼년결사를 시작한 이후 1999년 여섯 번째 회향을 하였고 지금도 매 안거마다 수십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고 있다.

 

내원사 창건설화

창건설화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하여 지는데 당시 동래 척판암에 주석하시던 원효성사께서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終南山 雲際寺)에 수도하던 천명대중이 뒷산이 무너져 위급한 사고를 당할것을 미리 아시고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拓板救衆)"이라고 판자에 써서 운제사 상공에 날아다니게 했다. 대중이 공중에 뜬 판자를 보고 놀라 일주문 밖으로 나온 순간에 산사태가 나서 절은 무너져 버리고 대중은 모두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 후, 구출된 천명의 대중은 도를 구하여 성사를 찾아왔으므로 성사는 그들을 데리고 머물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중방리(지금의 용연리)를 지날적에 원적산(圓寂山) 산신령이 마중 나와 "이 산에 천명이 득도할 곳이니 청컨데 이 곳으로 들어와 머무소서" 하니 성사는 산신령이 인도하는 바를 따라 지금의 산령각 입구 까지 온 즉 원적산 산신령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산령각을 짓게되어서 유독 내원사 산령각은 큰절에서 5리 밖에 떨어져 있게 되었다.성사께서 왼쪽 계곡을 따라 들어와서 대둔사(大屯寺)를 창건하고 상, 중, 하 내원암과 아울러 89개의 암자를 창건하시어 천명의 대중을 머물러 수도케 하였다.

 

그리고 대중을 산 상봉에 모이게 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였으므로 지금도 그곳을 화엄벌이라 하며, 988명이 이 산에서 득도하였고 나머지 12인중 8명은 팔공산(八公山)에서, 4명은 사불산(四佛山)으로 가서 도를 깨달았다하여 이후로 원적산을 천성산(千聖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창건 후 고려시대의 사적은 전하는 바가 없다.

 

 

내원사 문화유산

종목 명칭 시대명
보물 양산 내원사 청동북 고려시데

<내원사 청동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청동북

쇠북, 즉 금고(金鼓)란 글자의 뜻 그대로 청동으로 만든 북으로서 금구(禁口), 또는 반자(飯子, 半子) 등으로 불리는 절에서 쓰인 의식법구의 하나이다. 범종이 주로 아침ㆍ저녁의 예불이나 중요한 의식법회 때 사용된 것과 비교해 볼 때 금고는 공양시간을 알린다거나 사람을 모으는 등 그보다 단순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통도사에 소장된 내원사 금고는 뒷면이 넓게 뚫려 공명구가 형성된 일반적인 형식의 반자형 금고이다. 고면은 아직까지 두줄의 융기동심원으로 나누어 내구는 소문의 당좌를 그리고 그 외연에는 팔엽의 연화문을 변형시킨 화문을 섬세하게 장식되었다. 가장 바깥인 외구에는 네 곳을 돌아가며 유려한 운문을 장식하였다. 이러한 운문은 동아대박물관 소장의 대안원년명(大安元年銘(1085)) 반자의 운문보다는 훨씬 율동적이면서 도안화된 느낌이다.

특히, 고면의 구획이 아직까지 2구로 간략히 세분되었고 경암사 반자의 운문 형식을 그대로 계승한 11세기의 마지막 편년작품이면서도 섬세하고 유려한 문양이 잘 표현된 고려 금고 가운데 수작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면서도 고면의 문양이 섬세한 수작인 동시에 손상 없는 명문은 고려 금고 연구의 귀중한 편년 자료가 된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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