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힐링 사찰 여행

양평(용문산) 용문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65)

by 3000포석정 2023. 6. 24.
반응형

'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국보와 보물)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용문사 역사와 유래

913년913년(신덕왕 2년)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 하나, 일설에는 649년(진덕여왕 3년) 원효가 창건하고, 892년(진성여왕 6년) 도선이 중장하고, 또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인 1457년(세조 3) 중수되었다. 1907년 의병활동 때와 1950년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1982년 중창되었다.

 

용문사 문화유산

종목 명칭 시대명
보물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 조선시대
보물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조선시대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좌)와 금동관음보살좌상(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과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탑은 조안(祖眼)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받침돌과 탑몸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탑몸에는 한쪽 면에만 형식적인 문짝 모양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아래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고, 끝부분에는 꽃장식이 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權近)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탑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고려후기 14세기에 크게 유행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금동보살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상이다. 이 유형의 보살상은 현재 대마도 관음사에 봉안되어 있는 서산(瑞山) 부석사( 浮石寺) 금동관음보살좌상(1330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관음·대세지보살입상(이왕가박물관 구장(舊藏), 1333년), 국립전주박물관 금동보살좌상, 청양 운장암 금동보살좌상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도 같은 양식범주에 넣을 수 있다.

특징적인 표현으로는 왼쪽 가슴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긴 삼각형 모양의 내의(內衣)장식을 꼽을 수 있는데, 내의에 헝겊을 두껍게 겹쳐 만든 장식을 연결하여 어깨에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장식의 불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당말오대(唐末五代)부터이며 대표적인 예로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목조보살입상을 꼽을 수 있다. 근진미술관(根津美術館)의 아미타여래도(1306년)을 보면 내의장식에 화려한 문양이 보이는데, 고려후기 불보살상에서는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상에서와 같이 둥근 화문(花紋)을 새김으로써 화려한 내의 장식을 조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보관이 후보(後補)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조각적으로도 우수하며 고려후기 14세기 금동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상이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구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100대 명산, 용문산과 용문사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