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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구례(지리산) 화엄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49)-보물편

by 3000포석정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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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국보와 보물)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화엄사 '사찰의 역사'와 우리의 소중한 불교 문화유산중 '국보'와 관련 내용은 아래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구례(지리산) 화엄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49)-국보편

 

화엄사 창건 설화

농부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에 한창 바삐 일손을 놀리고, 동리에서 꼬마들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소꼽놀이 준비에 한창이었다. 꼬마들은 멀리 두류산을 향하여 합장하고 그들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조석으로 염불을 외던 대로 소리를 맞추어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선재할아버지는 밭 언덕에 쉬면서 꼬마들의 놀이에 눈을 던지며 미소를 지으면서 두류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박노인은 어제도 그제도 산 중턱 골짜기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한 그는 지금 또 안개마냥 골짜기에 번지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자연히 보니 안개가 아니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박노인은 필시 산중에 무엇이 있겠구나 하면서 마을사람 십여명을 대동하고 골짜기에 이르렀다.

 

계곡 겉에 움막을 발견하고 다가가니 움막 안에서는 낭랑한 목소리와 장중한 음성이 조화를 이룬 독경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은 발을 멈추고 귀를 모았다. 사실 마을 사람들로서는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한 다른 나라 사람이 읽고 있는 독경 소리를 알아들을 줄도 몰랐으며, 독경이 끝나고 잠시후 한 사문이 나왔다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친 사문의 모습은 이들의 마을 십여리 떨어진 홍련사(紅蓮寺)라는 절의 스님과 어딘가 다른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얼굴 생김새와 피부가 우리민족과는 전혀 달랐으며 가사를 둘둘 말아서 몸을 감고 있는 점이었다.

 

박노인은 사문과 합장한후 대화를 나눴지만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었다. 사문은 움막안에서 벼루, 붓, 종이를 갖고 나와 글로서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찾아왔으며 한문은 천축국에 유학은 양나라 스님에게 배웠고 백제국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찾아왔으며 한문은 천축국에 유학온 양나라 스님에게 배웠고 백제국에는 연이라는 짐승을 타고 비구니이신 어머니와 함께 날아서 왔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는 기색을 하였다. "빈도는 바닷가의 절에 살면서 바다 속에 사는 연이라는 짐승과 친해졌지요. 이 연은 능히 공중을 날으고 바다 속으로도 헤엄쳐 가며 바다에 떠서 배처럼 다니기도 합니다. 빈도는 이 연을 교화하여 오계(五戒)를 주고 제자를 삼아 이곳에 같이 왔고 방금 읽던 경전은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입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난 나라에서 오신 스님께서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화엄경올 백제땅에 가져왔으니,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충만한 이곳이 바로 최고의 불연국토(佛緣國土)다. 몇 달이 지나고 연기존자도 우리말에 상당히 익숙해져서 이제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향상되었고 박노인의 손자인 선재를 시자로 두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존자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하나 예불할 장소가 마땅치 못했다. 움막에서 그러한 생할을 할 수 없다하여 박노인의 마을 사람들은 법당을 건립하고자 존자님께 간청을 하여 불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이룩된 건물이 요사(索舍) 겸 설법전인 해회당(海會堂)이고, 또 한해가 지난 다음해 가을에 대응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인 법당이 낙성되었다. 바로 이해가 백제성왕22년 갑자세(서기544년)였다. 박노인은 존자에게 연기존자님 이라고 부르고 있아오니 연기사(緣起寺)라 하자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존자는 한참동안 침묵하여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며 "빈도는 본국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수지독송해 왔고 현재도 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수행을 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멀리창해를 건너 이 나라에 온 것도 화엄법문을 선양하기 위함이니 華嚴寺(화엄사)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지요." 마을사람들은 "존자님께서 命名(명명)한 가람 이름에 이의가 없이 대찬성입니다. 화엄사, 화엄경. 화엄법문, 연화장 세계라 이 나라가 연화장 불국토세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존자는 또 한마디 하는데 "이 산은 멀리 백두산의 정기가 줄곳 흘러 내려와서 이러진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 일컫는다니 좋은 이름이외다." 헌데 빈도가 이 산에 처음 닿았을 적에 삼매에 들어보니 문수대성께서 일만보살대중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친견하였으니 이산은 분명히 문수보살이 항상 설법하는 땅 임에 틀림이 없소. 그리니 만큼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善薩)의 이름을 택하여 지리산(智利山)이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리하여 智利山 華嚴寺가 되었다.

 

 

 

화엄사 문화유산(국보와 보물)

종목 명칭 시대명
보물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 통일신라
보물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 통일신라
보물 구례 화엄사 대웅전 조선시대
보물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 통일신라
보물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 통일신라
보물 화엄사 서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통일신라
보물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 조선시대
보물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조선시대
사적 구례 화엄사 백제
명승 지리산 화엄사 일원  

 

<화엄사 동 오층석탑(좌), 서 오층석탑(중앙), 대웅전(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동 오층석탑

화엄사 대웅전 앞에는 동서로 쌍탑이 서 있다. 그 중에 동쪽에 서 있는 것이 이 탑으로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서탑이 조각과 장식이 화려한 반면, 동탑은 아무런 장식없이 단정하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서탑의 기단이 2단인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1층 몸돌이 높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또한 각 층 몸돌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에 비해 높이의 줄어드는 정도가 적어서 늘씬해 보인다.

이 탑은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의 탑이 2단 기단인데 비해 1단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과 비슷한 9세기 경으로 짐작된다.

 

서 오층석탑

화엄사 대웅전 앞에 동ㆍ서로 서 있는 쌍탑 가운데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동탑이 아무런 조각이 없는 반면 서탑에는 조각과 장식이 가득하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향에 따라 배치하였고, 윗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나뉜 두 면에는 8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석탑의 형태는 높고 가파르면서도 상하의 체감비율이라든지,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수법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특히 아래층 기단의 12지신상 조각은 석탑에서 흔하지 않은 예의 하나이다. 위ㆍ아래층 기단과 1층 몸돌 세 곳에 나타난 조각상은 그 배치에 보다 신중을 기하였고, 특히 12지신ㆍ8부중ㆍ4천왕 모두 불교의 수호신적 기능을 지닌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탑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이나,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대웅전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큰 절이었고,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탄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중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인조 8년(1630)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ㆍ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규모도 크고 아름다우며 건축 형식의 특징과 균형이 잘 잡혀있어 조선 중기 이후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원통전 앞 사자탑(상좌), 화엄석경(상우), 서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일종 백지묵서다라니경 필사본>

 

원통전 앞 사자탑

이 탑은 절 안의 원통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늬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을 모방한 것이나, 조각수법은 이에 못미처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화엄석경

석경(石經)은 경전의 원문을 돌판에 새긴 것인데, 화엄석경(華嚴石經)은 화엄경을 엷은 청색의 돌에 새긴 것이다.

통일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화엄사에 각황전을 세우고 이곳에 화엄석경을 보관하였다. 각황전의 안쪽 벽에는 현재 그림이 걸려 있으나, 원래는 여기에 화엄석경이 벽을 이루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경에는 네모진 돌들을 서로 맞추어 끼웠던 듯 모서리에 연결을 위한 홈이 파여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석경들이 파손되었고, 색깔도 회갈색 등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파손된 것을 모아 지금은 약 9천여 점이 남아 있다. 글씨체는 해서체로 최치원이 정강왕 2년(887)에 쓴 쌍계사 진감국사비문과 비슷한데, 당시의 글씨체를 잘 보여주고 있어 희귀한 석경의 대표적인 예로 주목되고 있다.

이 화엄석경은 우리나라 화엄종 사찰의 상징적 유물로서 비록 파편이기는 하나 신라 후기의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서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1995년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소재하고 있는 화엄사 경내 서오층석탑(보물)의 해체보수작업을 하던 중 탑 내부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일괄 유물이다. 백지묵서다라니경, 청동불상범 외에 청동방울과 장식, 철제칼, 금속편, 수정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 중 백지묵서다라니경은 다라니경의 내용을 필사한 것으로, 고려시대 이전의 서적이나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통일신라기의 종이ㆍ글자체ㆍ문자 등 서지학적 혹은 불교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탑인은 한국 고대인쇄사에 있어서 초기단계를 알게 해주는 국내 유일의 실물자료이다.

청동불상범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유일한 불상주조용 틀로서 불상의 대량생산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화엄사 서오층석탑 발견유물은 통일신라시대 불교사상과 교리,사회적 배경을 종합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는 유물들로 서지학, 미술사 등 학술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대웅전 삼신불탱 석가모니불(좌)와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대웅전 삼신불탱

화엄사 대웅전에 보존되어 있는 그림으로 비로자나불ㆍ노사나불ㆍ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을 그린 탱화이다. 이 삼신불탱은 3폭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의 비로자나불탱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노사나불탱, 오른쪽에는 석가모니불탱을 각 한 폭씩 그렸다.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도는 유난히 몸광배가 큼직한 키형 광배에 악귀를 물리치는 뜻을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단에는 문수ㆍ보현보살을 포함한 6대보살과 함께 2구의 사천왕상을 그리고, 그 위로는 흔히 등장하는 타방불 대신 가섭ㆍ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제자 및 4금강과 3신장, 용왕ㆍ용녀를 에워싸듯 배치하였다.

이 삼신불탱은 18세기 조계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겸 스님 외 13명의 화원이 동원되어 그린 뛰어난 작품으로 필선이 섬세하며 녹색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길이가 4m를 넘는 거대한 3폭의 화면에 삼신불을 완전히 갖춘 매우 드문 예로, 통도사대광명전삼신불도(보물)와 더불어 18세기 삼신불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화엄사 각황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은 예천 학가산에서 화엄사로 온 계파 성능(桂坡 聖能)이 장육전(丈六殿, 지금의 각황전覺皇殿)을 중창한 후 1703년 주존불로 조성한 대형 불상으로서, 색난의 만년작(晩年作)이다. 각황전의 창건과 불상 조성은 화엄사 중창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불사(佛事)로서, 전각명도 왕실로부터 하사받아 이때부터 장육전에서 '각황전'으로 변경된 것이다. 또한 불상 조성에 있어 숙종을 비롯해 측근 왕실인사들인 인현왕후, 경종(景宗, 당시는 세자), 숙빈최씨(淑嬪崔氏), 영조(英祖, 당시는 연잉군) 등을 비롯해 여흥민씨, 해주오씨 등 유력가문들도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18세기 초 최대의 왕실불사였음이 인정된다.

각황전 불상은 도상학적으로도 의의가 크다. 석가ㆍ다보ㆍ아미타여래 삼불상과 석가여래의 좌우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다보여래의 협시보살로 지적보살(智積菩薩)이, 아미타여래의 협시보살로 관음보살이 짝을 이룬 도상은 1665년 간행『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에 의거한 '법화거불(法華擧佛)', 즉 법화신앙에 바탕을 둔 불교의식집에 등장하는 도상의 최초 조각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처럼 화엄사 삼불사보살상은 40여 년 동안 활동한 조각승 색난의 거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그동안 숙련된 기량과 원숙함이 반영된 그의 기념비적인 대작이자, 도상학적으로도 의의가 크다는 점, 수준 높은 조형성과 기술적 완전성을 갖춘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

 

<화엄사 및 지리산 일원,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적-명상(구례 화엄사 및 지리산 일원)

신라 경덕왕 13년(754) 황룡사 승려 '연기조사'의 발원으로 건립된 화엄종 사찰로 '도선국사'가 도참설에 의해 중창하였고, 조선시대 '벽암각성'의 중창이후 선ㆍ교 양종 총림 대도량의 역할을 하였다. 대웅전과 누문을 잇는 중심축과 각황전과 석등을 연결하는 동서축이 직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가람배치를 갖추고 있으며, 경내에는 국보 '화엄사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8점 등 중요 문화재가 있어 역사적ㆍ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지리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남으로 흘러 내려오다 다시 솟았다 하여 두류산이라고 불리는 영산으로, 천황봉, 노고단 등 수많은 산봉우리, 웅장한 기암절벽, 계곡, 울창한 산림 등이 있어 자연경관이 뛰어나며, 천년고찰 화엄사와 조화되어 역사 문화적 가치가 큰 경승지이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1)

100대 명산, 지리산과 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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