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삼화사 역사와 유래
삼화동 무릉계곡, 두타산(1351m)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삼화사는 인근 천은사, 영은사, 지상사 등과 더불어 영동 남부지역의 중심 사찰로 선종의 종풍을 가진 깊은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삼공암, 측연대, 중대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 사찰과 관련하여서는 세 가지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삼화사사직, 진주지 등에 의하면, 신라 선덕왕 11년(642)에 지장율사가 흑연대를 창건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다. 한편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말 굴산사의 개창주인 범일국사가, '척주지'에는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범일국사가 산에 들어와 불사를 지어 삼공암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과 아울러 현존하는 유물들을 감안하면 삼화사는 대체로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찰은 본래 동쪽 약 1.3km의 반릉 부근에 있었던 것을 무릉계곡 내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다. 여러 차례 화재로 인한 소실과 중창을 거듭한 삼화사는 1905년에 삼척지방 의병들의 거점으로 이용되었으며, 1906년에 일본은 의병의 거점 파괴라는 이유를 붙여 대웅전, 선당 등 200여 칸에 이르는 건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 이듬해인 1908년 대웅전. 요사채. 칠성당 등을 다시 건립하여 유지해 오다 197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삼화사고금사적' 기록에 의하면 철조 노사나불에 얽힌 설화가 있다. 옛날 두타산이 절터를 열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삼척의 정라진 포구에 석주(石舟)가 한 척 정박했다.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는 배였지만 스스로 미끄러지듯 발길을 따라 바다를 가르고 포구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정박했다. 배가 멈추자 선복에서는 잘생긴 육 척 장신의 대장부 세 사람이 내렸다. 이들은 각각의 손에 연꽃을 한 송이씩 들고 있었는데 큰형으로 보이는 부처님은 손에 검은 연꽃을, 둘째는 푸른 연꽃을, 셋째는 금색 연꽃을 들고 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서역에서 온 약사불 삼 형제였다. 약사불 삼 형제는 곧장 서쪽으로 우뚝 솟은 두타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큰형으로 보이는 약사불이 걸음을 멈췄다. 좌우로 산세를 둘러보니 검은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도를 닦고 중생을 제도할 만한 길지(吉地)였다. 형이 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터를 잡겠다. 이곳은 천하의 명산이니 둘러보면 너희들이 머물 곳도 있을 것이다. 각각 터를 잡은 후 다시 만나자. 이렇게 하여 큰형은 삼화촌에 자리를 잡았다. 둘째가 터를 잡은 곳은 야트막한 구릉이 있는 지상촌이고, 셋째는 그 보다 조금 떨어진 궁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삼 형제가 자리를 잡자 곧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삼 형제는 모두 변설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해 곧 이들을 교화해 제자로 만들었다. 제자들은 각각 자기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약사불을 위해 절을 지었는데 큰형의 절은 흑련대, 둘째는 청련대, 셋째는 백련대라 했다. 이렇게 교화활동을 펴던 약사삼불은 사람들의 인심이 순화되고 불심이 깊어지자 이제 다른 곳으로 떠날 때임을 알았다. 우리가 떠난 뒤 세월이 한참 더 지나면 인심이 다시 황폐해 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기는 하되 등신불(等身佛)을 남기고 가자. 그리하면 사람들이 그 등신불을 보고 언제나 우리의 가르침을 기억할 것이다. 등신불은 세세토록 변하지 않도록 철불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 형의 말을 들은 동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약사 삼 형제는 어느 날 철불로 등신을 남기고 두타산을 떠났다. 약사 삼 형제가 갑자기 사라지자 이들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던 사람들은 각각 스승이 있던 곳에 절을 지었다. 큰형이 있던 삼화촌 흑련대에는 삼화사를 짓고, 둘째가 머물던 지상촌 청련대에는 지상사를 지었다. 그리고 셋째가 머물던 궁방촌 백련대에는 영은사를 지었다.
삼화사 철불의 영험담은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조선 순조 때의 일이다. 어느 해 산불이 일어나 절이 몽땅 불에 타는 재앙을 입었다. 법당은 다 타고 철불만 동그라니 남아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불손한 생각으로 철불을 훔쳐서 달아났다. 철불을 지고 몇 발자국 움직이자 어디서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대성발악을 했다. 도둑은 혼비백산해 철불을 내려놓고 도망을 쳤다. 그 후 또 다른 어떤 도둑이 철불을 훔치러 왔다. 그는 철불이 워낙 무거워 전체를 가지고 갈 수 없자 무도하게 한 쪽 팔을 잘라 도망을 가다가 신장(新粧)으로부터 죄를 받아 입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었다. 뒤늦게 불상이 없어진 것을 안 삼화사 스님들이 부처님의 없어진 팔을 찾아 이리저리 산속을 헤매다가 이를 발견하고 다시 모셔와 법당을 새로 짓고 봉인해 놓았다. 이 얘기는 '진주지' 에도 실려 있다.
삼화사 문화유산
종목 | 명칭 | 시대명 |
보물 |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 | 통일신라 |
보물 |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 통일신라 |
▶삼화사 삼층석탑
삼화사에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비교적 높아 보이는 기단은 각 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기단의 맨 윗돌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번갈아 쌓아 올렸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든다. 여러 군데에 금이 가 있고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대체로 잘 남아있고 균형이 잘 잡힌 단아한 모습이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신괴임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1997년 4월 대웅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이때 위층 기단 안에서 나무 궤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형탑 25기와 청동제 불대좌조각 2점, 철조각 6점, 문서를 기록한 종이 1매 등이 들어있었다.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삼화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철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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