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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원주(치악산) 구룡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10)

by 3000포석정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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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구룡사 역사와 유래

신라 문무왕8년(668)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대웅전 자리에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창건하여 구룡사(九龍寺)라 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거북바위 설화와 관련하여 현재의 명칭인 구룡사(龜龍寺)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치악산구룡사사적』에 따르면 신라말의 고승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강희45년 글자가 새겨진 와당이 출토되어 숙종 32년(1706)에 구룡사가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앞 좌우에는 서상원과 보광루, 적묵당, 심검당의 승사가 있으며 이밖에도 원통문, 국사단, 사천왕문, 범종각, 응진전 등이 있다. 절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부도군이 있고, 또 구룡사의 전설을 말해주는 거북바위와 폭포아래에 용소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만든 황장금표가 있는데 이것은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하는 표식이다.

 

구룡사에 이어져 내려오는 전설로는 의상과 아홉용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원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다. 그곳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의상은 치악산을 향해 가던 중 사방을 살펴보니 동쪽으로는 주봉인 비로봉이 솟아 있고, 다시 천지봉의 낙맥이 앞을 가로질은 데다가 계곡의 경치 또한 아름다워 이곳은 절을 세울만한 곳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고 용들과 도술시합을 했다. 용들이 먼저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뇌성벽력이 치고 산들이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 용들이 흐뭇해하며 주변을 살피니, 의상은 비로봉과 천지봉에 줄을 걸어 배를 매 놓고 그 안에서 자고 있었다. 다음은 의상이 움직였다.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에 넣었다. 그러자 연못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용들이 뜨거워 날뛰었다. 그때 놀란 용 여덟 마리가 절 앞산을 여덟 조각내면서 동해로 도망치고, 한 마리는 눈이 멀어 함께 도망가지 못하고 못에 머물렀다. 그래서 절 이름도 구룡사(九龍寺)라 했고 한다. 세월이 흘러 절이 퇴락하게 되었고, 어느 날 한 노인이 나타나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 했다. 그대로 했더니 절이 더 힘들어졌고 폐사가 되려 했다. 이번에는 한 도승이 나타나 훈수를 했다. 거북의 혈맥을 끊어서 절이 쇠락해졌으니 다시 그 혈맥을 이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구룡사 문화유산

종목 명칭 시대명
보물 원주 구룡사 삼장보살도 조선시대

<원주 구룡사 삼장보살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구룡사 삼장보살도

원주구룡사 삼장보살도는 1727년에 화승 백기(白基)와 영휘(英輝)가 조성하여 치악산 구룡사에 봉안했던 삼장보살도이다.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다라니 등이 들어있는 복장낭도 잘 남아있는데, 화기에 기록된 제작 시기, 연화질 등이 일치한다. 가로와 세로로 접힌 자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안료가 박락되기는 했지만, 밝은 녹색과 적색을 중심으로 노란색과 파란색 등 중간색이 어우러진 화사한 색감, 균형 잡힌 신체에 둥근 얼굴, 살짝 치켜 올라간 눈, 가늘고 긴 코, 작고 꽉 다문 입술 등 18세기 전반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수작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전반 영가천도(靈駕薦度) 및 추선공양(追善供養)을 위한 수륙재의식 때 봉안되었던 작품으로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하여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영가천도 : 죽은 이의 영혼을 좋은 세계로 보내고자 행하는 종례의례ㆍ불교의식

*추선공양 :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야함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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