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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인제 백담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7)

by 3000포석정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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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백담사 역사와 유래

백담사는 7차례 화재로 인해 절의 터전을 옮기면서 이름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지은 『백담사사적』에 의하면, 이 절은 647년(진덕여왕 1) 자장(慈藏)이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하였으며, 그때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고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했다고 한다. 창건한 지 50여 년 만인 690년(신문왕 10)에 실화(失火)로 소실되어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狼川縣)에는 비금사(琵琴寺)가 있었으며, 주위의 산은 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의 산수가 매우 더러워졌지만,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그와 같은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의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전후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은 이전과 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날아가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겼노라."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그 신이함을 알렸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는 춘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을 통하여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중건을 서둘러 790년에 한계사 터 아래 30리 지점에 이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雲興寺)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 다시 불탔으므로 승려들이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深源寺)라고 개명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 법당ㆍ극락전ㆍ벽운루(碧雲樓)ㆍ선승당(禪僧堂)ㆍ동상실(東上室)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부속 암자로는 동암(東庵)ㆍ원명암(元明庵)ㆍ백련암(白蓮庵)ㆍ오세암(五歲庵)ㆍ봉정암(鳳頂庵) 등이 있었으며, 동훈ㆍ준희 등의 뛰어난 고승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 동안은 별다른 변화 없이 전승되다가 1432년(세종 14)에 네 번째의 화재로 절이 전소되었다. 그 뒤 2년 만에 동하(洞下) 30리쯤 되는 곳에 선구사(旋龜寺)라고 개칭하고, 법당과 극락전, 요사채 2동을 세웠다. 그러나 1443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고, 1447년에 옛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우고 영축사(靈鷲寺)라 하였다. 그러나 김시습(金時習)이 부속 암자인 관음암(觀音庵)에 와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던 1455년(세조 1)에 화재로 소실되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칭하였다. 1775년(영조 51) 겨울에 다시 불에 타서 승려들은 흩어졌지만, 최붕(最鵬)이 태현(太賢)ㆍ태수(太守) 등과 인법당(因法堂)을 짓고 심원사(尋源寺)라 개칭한 뒤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香閣)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다. 심원사를 다시 백담사로 개칭한 것은 최붕과 설담(雪潭)이 절을 중건한 1783년(정조 7)이었고, 이때의 백담사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백담사의 또 다른 전설로는 백담사라는 이름은 골이 깊고 흐르는 물의 연원이 먼 내설악에 자리한 절이라는 뜻이나, 거듭되는 화재를 피해보고자 하는 뜻이 담긴 이름이라는 설을 다음의 전설로 알 수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화재가 있을 때마다 주지스님의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분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기이하게도 지금도 이 근처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듯한 암석이 솟아 있다. 거듭되는 화재로 절 이름을 고쳐보려고 하던 어느 날 밤, 주지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潭]를 세어 보라고 하여 이튿날 세어보니 꼭 100개에 달하였다. 그래서 담자를 넣어 백담사라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지금의 장소로 옮겼는데, 담자가 들었기 때문에 그 뒤부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백담사 문화유산

종목 명칭 시대명
보물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조선시대
  만해 한용운 기념관 근대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백담사 극락보전 안에 주불(主佛)로 모셔져 있는 이 목불좌상은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푼다는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조선 영조 24년(1748)에 만들어졌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며 가는 눈, 작은 입, 오뚝한 코로 인해 독특한 인상을 나타낸다. 넓은 가슴과 둥근 어깨가 당당한 인상을 주는 상체는 다소 평판적이며, 하체는 넓고 큼직하여 상체와 조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 불상이 당시의 나무로 만든 불상 가운데 대표작임을 알려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꺼운 편으로 옷주름이 곡선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가슴에는 U자형의 중복된 주름을 보이는데 이러한 주름들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 이어진 것이다. 18세기 전반의 불상 가운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목불상은 불상의 조성연대를 알려주는 발원문(發願文)과 많은 복장물이 있어 특히 주목된다.

 

<백담사 만해기념관>

 

▶ 만해 기념관

수차례 화재로 인해 백담사에는 오래된 문화유산이 많지는 않지만, 국보와 보물에 버금가는 우리 민족이 지키고 계승해야 할 정신적 문화유산으로서 만해 기념관을 별도로 소개시키고자 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민족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95년 2월 6개월 만에 완공됐다. 지하 1층, 지상 1층 110평 규모로 모두 8백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와 함께 기념관 내부 한편에 만해 스님의 일대기를 비디오로 상영하고 있고, 만해 스님을 기리는 후학들이 만든 조각품 초상화 등도 선보이고 있다. 또한 기념관 앞뜰에는 시(나룻배와 행인)를 새긴 시비와 만해 스님 흉상이 나란히 서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만해 한용운이 백담사에서 불교 개혁의 가치를 들었던 『조선불교 유신론』과 『불교대전』의 원전을 대하게 된다. 만해 불교정신의 산실임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그리고 세계지리와 서양철학을 접했던 『영환지략』과 『음빙실문집』도 만나게 된다. 기념관 내부에는 만해 생전의 유물과 초관본, 백여 종의 판본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3ㆍ1독립운동시 민족의 자존심과 맹렬한 독립론을 전개한 만해의 옥중 투쟁을 보여주는 자료들도 정리되어 있다. 1962년 정부가 추서한 대한민국 건국공로 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이 전시되어 있으며 한용운 관련 석, 박사 논문을 비롯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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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100대 명산, 설악산과 백담사(봉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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