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사 동리산파의 탄생
742년(경덕왕 1)에 3명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였고, 고려 태조 때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가 중창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사찰로 삼았다. 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국사(慧徹國師)가 머물며 법회를 열어 동리산파의 시작이 되었으며, 이 절에 윤다가 132칸의 당우를 짓고 대사찰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ㆍ화엄사 등 전라남도 대부분의 사찰이 이 절의 말사였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수선(修禪)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사세가 축소되었다. 그렇지만 태안사는 동리산문의 중심도량으로서 개산조 혜철스님의 뒤를 이어 如선사ㆍ도선국사ㆍ광자대사ㆍ경보스님 등 걸출한 선승을 수도 없이 배출한 전통선문이다. 현재에도 태안사에는 원각선원이란 수행처가 개설되어 공부기간마다 정진하는 스님들이 모여 수행하고 있고, 절 주위에는 크고 작은 8개의 암자가 있는데, 이 모두 수행스님의 공부터로 쓰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당(願堂)이 되어 조정의 지원을 받았다. 1683년(숙종 9) 정심(定心)이 중창하였다. 1737년(영조 13)에 능파각(凌波閣)을 지었는데 능파각은 그 뒤에도 1776년ㆍ1809년ㆍ1861년ㆍ1923년에 각각 중수한 바 있다.
동리산문은 한국 풍수의 원조인 도선 국사가 수도한 사찰이다. 고려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 때는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이 머물던 통에 왕실의 원찰 대접을 받았다. 현재 남아 있는 원당완문(願堂玩文)이 바로 그 중거이다. 그러다가 6ㆍ25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불타버렸으며 이후로 태안사는 청화 스님의 중창이 있기까지 30년 넘게 폐사 상태였다.
▣ 명당으로서의 태안사
태안사는 봉두산(754m) 서쪽 자락에 있으며 봉두산의 옛 이름은 동리산인 것으로 보인다. 동리산과 봉두산 모두 봉황을 상징하고 있어 봉황이 자주 등장하는 곡성의 풍수지리적인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북쪽으로는 대황강, 동쪽으로는 섬진강을 품고 있는 봉두산은 인근에 올망졸망 펼쳐진 산군들 사이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태안사는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28년까지 대안사로 불려 오다 조선 이후 태안사로 불렸다. 이는 절의 위치가 "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가 머물기에 고요하다. 용이 깃들이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여름이 시원하고 겨울에 따듯하여 심성을 닦고 기르는데 마땅한 곳이다"라는 적인 선사 혜철의 부도 비문처럼 '대'와 '태'의 뜻은 서로가 통하는 글자이고, 평탄하다는 의미가 덧붙여진 이름이다.
태안사 경내에 들어가면 큰 연못이 하나 있다. 이는 태안사의 풍수와 관련되어 있으며 태안사가 위치한 자리는 풍수로 말하면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이라고 한다. 봉황이 둥지로 내려오는 형국이다. 그래서 태안사의 뒷산도 봉두산(鳳頭山)이라 해야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오동나무 동(桐)자를 써서 동리산(桐裏山)이라 한 것은 봉황이 오동나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봉황이란 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말처럼 오동을 좋아한다. 즉 봉황이 내려앉으려면 오동나무가 필요하듯이 그 필요에 의해 오동나무 동 자를 써서 지명으로 보완을 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비봉귀소형의 조건은 네 가지이다. 동쪽으로는 흐르는 물이 있어야 하고, 남쪽에는 연못이, 서쪽에는 큰 길이, 북쪽에는 높은 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동쪽에 흐르는 물이 없다면 버드나무를 아홉 그루를 심고, 남쪽에 연못이 없으면 오동나무 일곱 그루를 심어야 한다. 그런데 태안사의 입지는 남쪽에 있어야 할 연못이 없다. 그러한 이유에서 연못을 크게 팠을 것이다.
▣ 태안사의 쇠락과 중건
구산선문의 하나였고, 동리산파의 중심사찰이었던 태안사는 한때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만큼 세력이 컸으나, 고려중기 순천의 송광사가 수선결사(修禪結社)로 크게 사세를 떨치는 바람에 위축되었다. 조선초기 숭유억불정책에 밀려 쇠락한 채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였는데, 그나마 절이 유지된 것은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원당사찰이 된 것에 힘입은 바 컸다. 숙종과 영조 때에 연이어 중창하여 대가람이 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일주문과 부도탑뿐이었다. 경내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게 되는 큰 건물이 보제루(普濟樓)이고, 문이 시원스럽게 열린 대웅전은 전쟁 중에 불타버린 것을 봉서암(鳳西庵)에서 20년 전에 옮겨왔다. 그 뒤 태안사가 여러 채의 건물을 새로 짓고 청정한 도량으로 이름이 높아진 것은 우리 시대의 고승 청화선사가 수십 년을 이 절에 주석(駐錫)하면서 이룩한 성과일 것이다.
▣ 태안사의 남아있는 소중한 문화유물
능파각(凌波閣)은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 건물입니다.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凌波)’라 이름하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한다. 850년(문성왕 12)에 혜철 선사가 처음 지었고, 941년(태조 24) 광자 대사가 수리하였으며 그 뒤 파손된 것을 1767년(영조 43)에 다시 지었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기둥으로 여러 가지 동물상을 조각한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다리와 문, 누각의 역할을 함께 하도록 지은 특이한 건물입니다.
삼층석탑은 연못 중앙에 마련된 작은 터에 자리하고 있으며 절 내의 광자 대사 부도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원래는 기단의 한쪽 면과 탑신의 1층 지붕돌, 2, 3층 몸돌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이 보충하여,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갖추었습니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훗날 보충해 놓은 것이긴 하나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과 안정감이 느껴지며 기단과 지붕돌의 조각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대형의 왕실 발원의 범종에서 사찰 중심의 범종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작품으로, 전통 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작과 관련된 명문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주조기술도 비교적 우수한 16세기 사찰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태안사 바라는 승무를 출 때 사용한 것으로 지름 92㎝로 국내에서 제일 큰 바라로 외곽의 일부가 약간의 파손이 있을 뿐 손상이 거의 없다. 이 바라에는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의 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명문이 남아 있다. 둘레 3미터로 우리나라 최대의 것이다. 크기로 보아 직접 들고 치기보다는 어느 곳에 매달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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