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불국사 역사와 유래
불국사는 경상 북도 경주시 동쪽 토함산에 있는 절이다. 고려 시대에 만든 역사책《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절은 신라 경덕왕 때인 751년에 김대성이 세웠다. 그러나 불국사의 내력을 적은 《불국사 역대 고금 창기》에 따르면 이 절은 528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또,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절의 규모를 크게 늘렸고, 문무왕 때인 670년에 무설전을 새로 지었으며, 751년에 낡고 규모가 작았던 이 절을 당시의 재상 김대성이 크게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자료를 참고로 할 때, 불국사는 처음에 작은 규모로 세워졌던 것을 김대성이 크게 늘려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으면서 규모가 2,000여 칸으로 커졌으나, 임진왜란 때인 1593년에 왜군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 버렸다. 그 때, 금동 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 그리고 돌로 된 다리와 탑만이 불에 타지 않았다. 왜군의 방화로 불타 버린 불국사의 목조 건물들은 광해군 때인 1612년에 경루ㆍ남행랑ㆍ범종각 등이 복구되었고, 인조 때인 1630년에 자하문, 1648년에 무설전이 다시 세워졌다. 이어서 1659년에 대웅전이 세워지는 등, 순조 때인 1805년까지 40여 차례의 복원 공사가 계속되면서 안양문ㆍ극락전ㆍ비로전ㆍ관음전ㆍ나한전ㆍ시왕전ㆍ조사전 등이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면서 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복원 공사도 중단되었고, 이미 세워졌던 건물들도 낡고 파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오다가 일제 침략기를 맞았다. 1924년에 대규모의 보수 공사를 하면서 다보탑을 해체ㆍ수리하였다. 그 때 탑 속에서 금동 불상ㆍ사리 장치 등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나 행방 불명되었고, 관련된 기록 자료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 후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하였다. 이 때, 그 때까지 옛 터로만 방치되어 오던 자리에 무설전ㆍ경루ㆍ관음전ㆍ비로전ㆍ화랑 등이 복원되고, 대웅전ㆍ극락전ㆍ범영루ㆍ자하문 등이 새롭게 단청되었다. 불국사 경내 면적은 38만 8,570㎢이며,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에 국보급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불국사 문화유산
종목 | 명칭 | 시대명 |
국보 | 경주 불국사 다보탑 | 통일신라 |
국보 |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 통일신라 |
국보 |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 | 통일신라 |
국보 |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 통일신라 |
국보 |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 통일신라 |
국보 |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 통일신라 |
국보 |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통일신라 |
보물 | 경주 불국사 사리탑 | 고려시대 |
보물 | 경주 불국사 석조 | 통일신라 |
보물 | 경주 불국사 대웅전 | 조선시대 |
보물 | 경주 불국사 가구식 석축 | 통일신라 |
보물 | 경주 불국사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 | 조선시대 |
보물 | 경주 불국사 삼장보살도 | 조선시대 |
사적 | 경주 불국사 |
▶다보탑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ㆍ너비ㆍ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
▶삼층석탑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각 10.75m, 10.29m로 비슷하다 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ㆍ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년 9월에는 안타깝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연화교 및 칠보교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ㆍ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청운교 및 백운교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66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신체 표현은 장중하여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 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과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의 석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탑 내부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유물들이다. 중심부에 놓여졌던 사리외함과 함께 안에는 원구형으로 생긴 은제의 사리 내ㆍ외합과 금동사리합,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각종 구슬과 함께 있었다.
사리함의 주위에는 청동제 비천상과 1점의 원형동경과 1/4동경편, 목탑, 경옥제곡옥, 구슬, 향목 등이 놓여있었다. 사리함의 바깥 기단부 바닥에서는 비단에 쌓인 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는데, 종이가 한데 뭉쳐져 글의 내용은 알 수 없다. 사리외함은 4면에 덩굴무늬를 좌우대칭의 모양으로 뚫어 새겼으며, 몸체를 받치고 있는 기단부도 무늬를 뚫어 새겼다. 지붕 위에는 덩굴무늬를 새기고 지붕 꼭대기, 모서리, 지붕 마루에는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지붕 끝에는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달아놓았다. 정교하게 투조된 뚜껑에 보석까지 감입된 8세기 사리기의 걸작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중엽에 간행된 현재까지 알려진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본으로서, 너비 약 8㎝, 전체길이 약 620㎝ 되는 곳에 1행 8∼9자의 다라니경문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발견 당시 부식되고 산화되어 결실된 부분이 있었는데 20여 년 사이 더욱 심해져 1988년에서 1989년 사이 전면 수리 복원하였다. 불경이 봉안된 석가탑은 751년 불국사가 중창될 때 세워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 경은 그 무렵 간행된 것으로 인정된다. 또한 본문 가운데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의 집권 당시만 썼던 글자들이 발견되어, 간행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사리탑
불국사 강당 뒤쪽의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석조
경주 불국사 석조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수조의 형상이 원형인 백제시대의 석조와 달리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형상인 직사각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내ㆍ외면에 조각이 있는 점과 다른 직사각형의 석조와는 달리 모서리를 둥글게 한 것이 특이하다. 특히 내부 바닥면의 화려한 연화문 조각은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뛰어난 조형의식과 높은 예술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인정된다.
▶대웅전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중창기록과 단청에 대한 기록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ㆍ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으로 그 가치가 크다.
▶가구식 석축
신청 가구식 석축과 연결되어 있는 청운ㆍ백운교 및 연화ㆍ칠보교는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금번에 신청된 가구식석축 또한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조건축으로 건축적 조형미는 물론 그 기법이 매우 독특하여 신라 석조건축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주고있다.
▶영산회상도
'경주 불국사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慶州 佛國寺 靈山會上圖 및 四天王壁畵)'는 1769년에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와 상궁 김씨 등이 시주하여 제작한 불화로, 영산회상도와 2점의 사천왕 벽화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조성연대는 영산회상도에만 1769년이라는 연대가 있고 사천왕 벽화에는 조성연대 없이 화원의 이름만 적혀 있는데, 영산회상도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이 사천왕벽화를 그리는 데도 참여하였고 두 불화에서 인물표현과 채색 등에 유사점이 많은 것을 볼 때 영산회상도와 사천왕벽화는 같은 해에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화는 18세기 중후반 통도사와 봉정사 등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들이 함께 제작한 것으로,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색감과 안정적인 구도 등 경상도 지역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영산회상도를 구성함에 있어 거는 그림과 벽화가 한 세트를 이루는 구성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조선 후기 불화조성의 한 면을 잘 보여주는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삼장보살도
이 불국사 삼장보살도는 1739년 밀기(密機), 채원(彩元), 서징(瑞澄) 등이 경주 거동사(巨洞寺) 오주암(五周庵)에서 제작하여 불영사에 봉안하였다는 분명한 화기를 남기고 있어 18세기 전반기 삼장보살도 도상 및 화풍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천장보살이 범협(梵夾)같은 지물을 들고 있다든가, 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의 협시가 좌우 대칭을 이루며 무장형의 인물을 배치하였다든가 하는 점은 이 삼장보살도가『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을 근거로 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팔공산 지역과 구미, 상주 일원의 경북 중북부 지역의 결합된 화풍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렇듯 이 삼장보살도는 모든 면에서 18세기 전반기 불화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며, 이 시기 화풍 및 삼장보살도의 도상 등 불화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경주 불국사
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ㆍ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신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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