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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전시, 문화 여행

국립중앙박물관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 소개(1)

by 3000포석정 2023.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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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2022년 10월 25일부터 3월 15일까지 관람 가능하다. 한국-오스트리아 수교 130년을 맞이해서 열린 전시로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던 15~20세기 합스부르크 왕가가 수집한 르네상스, 바로크 미술의 대표 소장품들 걸작 96점을 볼 수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했던 시대의 전시인 만큼 역사 공부를 하고 보면 더 즐겁게 감상을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미술을 공부하지 않는 일반인으로 관람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나만의 가치를 부여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2가지가 있다.

첫 번째 가치는 역사적인 가치이다. 미술품을 관람하기 전 해당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작품에 역사적 숨결을 불어넣을 수가 있고 그 당시 가지고 있던 사회적 분위기, 역사적 사건을 상상하면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역사 중 임진왜란과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외국인이 단순히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박물관에서 본다 한 들 어떤 가치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 가치는 미술사학적인 가치이다. 이 부분은 전문적인 학술지식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더라도 그 작품이 탄생된 미술사적 흐름을 전, 후로 살펴본다면 왜 이 작품이 유명한지, 어떤 점에서 지금까지도 박수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보통 미술작품들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처음 시도한 작가나 작품들이 한 시대를 이끌어가면 그 시대를 펼친 예술가와 작품들을 걸작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높은 거 같다. 예를 들면 인상파 미술가들 이전 18세기말 유럽은 낭만주의 화풍과 신고전주의 화풍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19세기에 이르러 사진기가 발명되고 사진의 정밀 묘사력을 따라갈 수 없는 시대가 도래되자, 인상주의자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인 원근법, 균형 잡힌 구도, 이상화된 인물 등을 거부하는 등 미술전통에 혁신을 가져와서 새로운 미술을 개척했고 그러한 관점에서 작품들을 바라본다면 전문적인 미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자기만의 관점에서 훌륭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특별 전시전은 당시 유럽에서 제일가는 가문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를 이해하고 보는 역사적 가치 측면에서 감상한다면 보다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

 

참고로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 화려한 내부가 돋보이는 웅장한 19세기 합스부르크가의 예술 컬렉션과 유물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합스부르크 왕가 역사 흥망 성회>

 초창기

지금이야 영세 중립국이지만 당시 스위스는 독립된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몇몇 유력 가문이 세력권을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까지만 해도 알프스 산매 언저리에 옹거 하던 시골 귀족 가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10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라는 이름 자체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근본도 없는 가문은 아니었으며, 애초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7세기경부터 알자스 일대에 터를 잡으며, 교황을 배출한 적도 있는 대귀족인 에티호넨 가문의 방계 가문이어서 어느 정도 나름의 명예는 있었다.

 

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 아르가주 주를 벗어나 유럽의 패자로 급부상할 계기가 마련된 것은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시대(1254~1273)였다. 강력한 위세를 지닌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잇달아 파문을 날려 버리는 상황 속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후사가 끊겼다. 이후 강력한 교황권 및 제후 간의 권력 다툼으로 약 20년간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며 대공위 시대의 혼란하 상화잉 이어졌다. 대공위 시대가 이어지며 독일의 정세가 혼란해지자 이제는 교황이 제발 누구든 황제가 되어달라구 애걸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나,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은 내가 황제를 하기 싫지만 남의 세력이 커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타협책으로 일부러 한미한 가문의 가주를 바지사장 삼아 황제로 옹립하려 했는데, 이때 포착된 것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16세기 카를 5세(제위:1519~1556년) 대에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패자로 등극했다.

 

그 기반을 만든 것은 선황 막시밀리안 1세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스스로 최초의 '선출황제'임을 선언하면서 황제 선출에서 교황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안정된 황권을 바탕으로 막시밀리안 1세는 적극적인 결혼 정책을 펼쳤다. 이런 혼인 동맹 후에 합스부르크 가문에 기적 같은 행운이 일어났는데 이들 가문이 모두 대가 끊기면서 그 가문들의 영토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대로 인수헀다.

성장기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자 스페인 이사벨 1세의 손자인 카를 5세는 부모와 조상의 후광, 특히 할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막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 시대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외형상 최전성기를 맞았다. 유럽 전역을 석권했던 카를 5세 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계 합스부르크로 분열되었다.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스페인+네덜란드 저지대+이탈리아 반도 영토+아메리카 대륙+필리핀 등 나머지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각각 나누어 양위했다. 물론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지위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으나, 당시 독일 제후들의 반발로 동생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페리디난트 1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부유한 저지대와 식미지를 물려줬지만, 형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물려받은 페르디난트 1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추진했던 결혼 덕분에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라는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게 되었다. 때문에 페르디난트 1세 이후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의 최강자로 거듭났다.

 

<합스부르크 왕가 영토>

 

부흥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흥은 18세기에 찾아왔다. 1683년 오스만 제국이 대규모로 침공해 와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레오폴트 1세는 독일의 영방 제후들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우군으로 끌어들여 빈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낸 후 퇴각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곧장 추격하여 대투르크 전쟁을 일으켰다. 사부아 공자 외젠의 맹활약으로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탈환했고 이후 피사로비츠 조약으로 동유럽을 잠식해 들어갔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게 18세기 전반기에 다시 중흥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예기치 못한 것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상기된 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카를 6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카를 6세는 살리카 법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문을 물려주기 위해 국사조칙을 공표했다. 그러나 주변 세력들은 살리카 법을 근거로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 때문에 카를 6세는 주변국에게 많은 이권을 떼주거나 영토를 양보해야 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쇠퇴기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프랑스혁명이 터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실로 혁명 전파를 두려워한 여러 왕정 국가들과 같이 대프랑스 전쟁을 일으켰으나, 혁명 프랑스군의 놀라운 전투력과 때마침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패전하고 벨기에와 이탈리아마저 빼앗겼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위기에 처한 프란츠 2세는 그동안 동군연합 상태를 유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우고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과 손잡으며 공동 전선을 결성했으나 치명타를 입고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 자체가 와해당했다.

 

이후 민족주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으며,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이 민족의식에 대해 눈 뜨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오스트리아 제국은 한동안 건재하게 버텼으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제위 계승자가 암살당하면서 이전에 쌓이고 쌓인 수많은 갈등이 폭발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카를 1세가 퇴위하며 길었던 합스부르크의 시대가 막을 내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도 해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에 사회주의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군림하는 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합스부르크 왕가 인물도 소개>

<막시밀리안 1세와 루돌프 2세 초상화>

<막시밀리안 1세 초상화>

150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른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찬란한 역사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다. 그는 아들과 손자를 시기적절하게 결혼시켜 많은 영토를 획득하여 유럽 변방에 지나지 않던 오스트리아를 강대국의 반열에 올렸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가문인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던 영토는 제후가 직접 다스리는 영방으로 이루어져 있어 황제의 실질적인 통치가 약했다. 이에 막시밀리안 1세는 강한 군주의 위엄과 명성을 알리기 위해 많은 초상화를 그려 선전 수단으로 활용하는 정치 수완을 발휘했다.

<루돌프 2세 초상화>

루돌프 2세는 모든 합스부르크 군주들 가운데 역사상 가장 독특한 통치자였을 것이다. 그는 부친 막시밀리안 2세의 자유로운 종교관을 탐탁지 않아 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 의해 스페인 왕실의 엄격한 가톨릭 교리 안에서 성장했다. 1572년 헝가리 왕에, 1575년 보헤미아 왕에 즉위했고, 1576년 막시밀리안 2세의 황위를 물려받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마티아스 대공과 페리디난트 2세 대공 초상화> 

<마티아스 대공 초상화>

마티아스 대공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마리아 왕녀의 아들이자 루롤프 2세의 동생이었다. 형 루돌프 2세가 스페인 왕실에서 엄격한 가톨릭 교리 아래 교육받았던 것과 달리, 마티아스는 관대한 종교관을 가졌던 부친 막시밀리안 2세의 빈 궁정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성장했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1세 황제 보헤미아의 공주 안나 야기에우워의 차남으로, 1529년 6월 14일 린츠에서 태어났다. 1567년에는 선왕의 합스부르크 제국 통치권 분할로 티롤 후백국과 외(外) 오스트리아의 공식통치권자의 지위에 올랐다.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과 스페인 왕 펠리페 4세 초상화>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프랑스식 옷차림을 한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의 모습은 그가 패션에 민감하고 허영심이 많았음을 드러낸다. 의복을 장식하는 리본과 나비모양 매듭은, '갈랑'이라 불리던 프랑스 패션의 요소로, 17세기 중엽 유럽에서 유행했다. 작품을 그린 프란스 라위크스는 루벤스에게 훈련을 받은 후 티롤을 다스린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의 초상화를 여러 점 제작했다.

<펠리페 4세 초상화>

펠리페 4세는 44년간 스페인을 통치했는데 그의 재위 기간은 정치, 경제, 사회적 격변기였다. 첫 번째 왕비 엘리자베트가 사망하자, 펠리페 4세는 자신의 조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대공과 1649년 결혼했다. 두 번째 왕비는 그에게 세 명의 아들과 두 딸을 안겨주었지만 그중에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후일 왕위를 계승한 카를로스 2세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스페인 왕비 엘리자베트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초상화>

<스페인 왕비 엘리자베트>

펠리페 4세는 1615년 프랑스 왕 알리 4세와 마리 데 메디치의 딸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펠리페 4세보다 2살 연상이었던 엘리자베트는 아름답고 학식이 뛰어난 배우자였다. 펠리페 4세는 국정 운영을 총신에게 맡겼는데, 당시 총신이었던 올리바레스 백공작은 엘리자베트가 왕비가 된 후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그러던 중 펠리페 4세와 올리바레스가 카탈루냐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왕궁을 비웠을 때, 왕비는 자신의 지성과 통치력을 발휘한 훌륭한 섭정으로 역량을 증명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는 스페인 펠리페 4세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 마리아나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1660년 4월, 펠리페 4세는 자신의 조카인 황제 레오폴트 1세와 마르가리타의 결혼을 약속했다. 12세 공주와 삼촌과의 약혼은 1663년 공표되었고, 같은 해 혼인 계약도 체결됐다. 1665년 12월, 14세였던 공주는 빈에 도착해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생활 6년 동안 어린 황후는 여섯 번 임신했고, 일곱 번째 임신 중이던 1673년 3월 12일, 불과 2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아이 중에 단 한 명, 마리아 안토니아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1656년 스페인 왕실은 다섯 살이 된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오스트리아 황실로 보냈다.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과 페르디난트 3세 초상화>

<레오폴르 빌헬름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성공한 지휘관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오른손에는 군대 지휘권을 상징하는 지휘봉을 쥐고, 왼손을 허리에 올린 채 자신만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가 입은 우아한 검정 갑옷은 1620년대 중반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선명한 빨간색과 금색의 섬세한 레이스 현장과 여러 겹으로 된 흰색 레이스 옷깃은 그의 외모를 더욱 빛나게 한다. 현장 위로는 독일 기사단의 십자 휘장을 걸었다.

<페르디난트 3세 초상화>

페르디난트 3세 황제는 페르디난트 2세와 황후 바이에른의 말이아 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세 번째 아들이었다. 그는 1625년 헝가리 왕으로, 1627년에는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다. 30년 전쟁에서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를 지휘했고,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는 페르디난트 추기경이 지휘하는 스페인 군대와 함께 스웨덴-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다. 페르디난트 3세는 아버지의 신성로마제국 황위를 1635년에 계승했다. 1648년 프랑스, 스웨덴과 베스트팔렌 조약에 서명하는 것으로 길고 길었던 30년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루게 된다.

<요제프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초상화>

<요제프 2세>

이 그림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이자 프란츠 1세의 황위를 물려받은 요제프 2세의 초상으로, 그의 궁정 화가 요제프 히켈이 그렸다. 요제프 2세는 녹색 기마병 제복을 입고 책상 앞에 서 있다. 왼손에는 아마도 고개를 들기 전까지 정도하고 있었을 서신을 들고 있다. 책상 위에는 다른 서류, 필기구, 펼쳐진 지도, 지구본이 놓여 있다. 서재를 배경으로 한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초상화는 요제프 2세가 '일하는 황제'로서 묘사되기를 원했음을 시사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초상화>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 마리아 테레지아이다. 1736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슈테판과 10년의 열애 끝에 결혼했다. 1740년 그녀의 아버지 카를 6세 황제가 서거하자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으로 왕위를 계승한다. 탁자 위에 진열된 세 개의 왕관으로 세 군주국의 위엄을 알 수 있다. 헝가리의 성 슈테판 왕관 뒤로는 보헤미아의 성 바츨라프 왕관이 있고 그 뒤로 오스트리아의 대공관이 놓여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 수 없었으므로 남편 슈테판 공이 1745년 황제로 즉위했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와 프란츠 2세 초상화>

<프랑스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인 마리아 안토니아 대공은 1755년 11월 2일 빈에서 태어났다.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는 그녀가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관'의 계승자와 결혼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1770년 15세의 나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자와 결혼했고, 그는 1774년 루이 16세로 즉위했다. 그녀는 아름답고 고상했지만 한편으로는 깊이가 없고 오만했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마리 앙투와네트와 남편의 운명을 결정했다. 1789년 9월부터 혁명의 포로가 된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 처형당했고, 그의 뒤를 따라 마리 앙투와네트도 1793년 10월 16일 처형대에 올랐다. 그들의 네 아이 중 '마담 루아얄'이라 불리던 왕녀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프란츠 2세>

후일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 황제이자 초대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1세 황제로 등극하는 프란츠 대공은 레오폴트 2세 황제의 장남으로 1768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이 작품에서 7살의 프란츠 대공은 오스트리아식 군복을 입고 황금양모 기사단의 휘장을 걸고 있다. 특히 차기 후계자로서 위엄 있는 자세와 표정으로 그려졌다. 공식 기록을 목적으로 한 초상화로서 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주문하여 제작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시시) 황후 초상화>

<프란츠 요제프 1세>

역대 최장기간 오스트리아를 다스린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1848년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되었고,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을 결성하여 헝가리 왕으로도 즉위했다. 이 초상화에서 황제는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의 정복 위에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기사단 현장과 휘장을 갖추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재위하던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주의가 급부상하면서 보수와 혁명, 전통과 개혁 사이의 과도기를 겪고 있었다. 제국의 몰락기, 황제는 밖으로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동맹관계 속에서 안정을 찾고자 하였다. 이 초상화는 1896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는 축제 무렵에 주문된 것을 보인다.

<엘리자베트(시시) 황후>

'시시(Sisi)'라는 애칭으로도 알려진 황후 엘리자베트는 바이에른 공국의 막시밀리안 공작과 바이에른의 공주 마리아 루도비카의 딸로 태어났다. 마리아 루도비카 공주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어머니인 바이에른 출신 조피 대공비의 여동생이었다. 이 초상화는 그녀가 2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이다. 어두운 배경과 밝은 푸른빛 드레스는 아름다운 엘리자베트의 미모를 더 강조하고 있다. 현재도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황후이다.


황제의 취향을 담은 프라하의 '예술의 방' 작품들은 다음 2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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