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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전시, 문화 여행

국립중앙박물관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 소개(2)

by 3000포석정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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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들이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수집한 특별한 예술품을 선보인다. 오스트리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유럽을 호령한 이들은 자신만의 철학과 예술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특색 있는 유산을 후대에 남겼다.

 

황제의 취향을 담다, 프라하의 '예술의 방'

 

루돌프 2세는 형편없는 정치적 감각을 가졌지만, 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 역사에서 중요한 황제로 평가받은 이유는 탁월한 예술 감식안 덕분이다. 황제는 수집한 예술품들을 '예술의 방'에 무작위로 전시했다. '예술의 방'의 전신은 페르디난트 1세의 '경이로운 방'이었다. 그의 '예술의 방'은 자연과 예술이 한데 모인 소우주적 개념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루돌프 2세의 수집품은 현재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의 기초를 형성했을 정도로 수집의 역사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한다.

켄타로우스족 에우리티온을 죽이는 헤라클레스(좌)와 헤라클레스(우)

<켄타로우스족 에우리티온을 죽이는 헤라클레스>와 같은 구도의 청동 복제품 몇 점이 전해지고 있고. 그중에서 빈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품이 최고로 평가된다. 헤라클레스와 켄타로우스의 눈에 눈동자와 홍채를 새긴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헤라클레스> 이 조각은 초기 르네상스에 복제된 것이다. 조각의 제작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인체를 극도로 세밀하게 재현한 작업 양식은 이탈리아보다는 북부 유럽 네덜란드 작가의 작품임을 암시한다.

 

갑옷은 패션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갑옷은 남성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값비싼 물건 중 하나였다. 갑옷은 단지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기도 했다. 갑옷 한 벌은 정치적ㆍ군사적 권력의 상징이자, 그것을 입은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귀족 신분 이상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통치자의 경우 군사 작전뿐만 아니라 대관식이나 결혼식, 제국 의회와 같은 특정한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갑옷을 제작했고, 대표적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막시밀리안 1세의 갑옷(좌)과 루롤프 2세의 '리본 장식' 갑옷(우)

<막시밀리안 1세의 갑옷> 이 갑옷은 1490년대 초 오스트리아 등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영지를 지배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막시밀리안 1세 황제가 주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막시밀리안 1세의 갑옷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로, 갑옷 제작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루돌프 2세의 '리본 장식' 갑옷>은 막시밀리안 2세와 에른스트 대공을 위해 주문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갑옷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활동했던 갑옷 제작자 안톤 페펜하우저에 의해 제작되었다. 갑옷의 이름인 '플레히트반트(리본 모양)'는 갑옷 전체를 장식하는 금색 리본과 잎 무늬에서 유래한다.

세로 홈 장식 갑옷(좌)과 페리디난트 2세 대공의 독수리 장식 갑옷(우)

<세로 홈 장식 갑옷>은 율리히 공작이 착용했던 것으로, 세로 홈 장식 갑옷은 당대의 주름 장식 의복을 모방한 것이었다. 또한 홈 장식은 구조적으로 갑옷의 강도를 높임으로써 보호 기능을 강화했다. 이 갑옷에서는 독특한 얼굴 부분이 눈에 띈다. 이러한 얼굴 형태의 투구는 당시 유행하던 가면극이 축제 기간에 열린 마상 창 시합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주고 있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은 역사적 인물들과 당대 유명한 인물들의 무기와 갑옷을 수집하여 '영웅들의 무기고'에 전시한 것으로 유명했고, 이 갑옷도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의 요청으로 루트비히 3세 공작이 선물한 것이다.

 

<페리디난트 2세 대공의 독수리 장식 갑옷>은 1547년 페리디난트 2세 대공을 위해 제작되었고, 현존하는 르네상스식 갑옷 세트 중 가장 큰 것이다. 온전하게 보존된 이 갑옷은 90개의 부속으로 구성되었다. 이 전신 갑옷은 옛 오스트리아의 상징인 외머리 독수리를 식각과 금박으로 장식한 무늬가 거의 모든 표면을 덮고 있어 '독수리 갑옷'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예술공예품들과 모자이크 작품

누금 장식 바구니(좌)와 조가비 모양 그릇(우)

<누금 장식 바구니> 모양의 금 세공품은 비록 크기는 작지만 루돌프 2세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루돌프 2세는 이 바구니를 가장 우수하고 특별한 예술품을 모은 공간인 '쿤스트캄머(예술의 방)'에 포함했다. 누금 세공으로 섬세하게 작업한 이와 같은 금세공 작품은 장식용으로 수집되어 17세기 유럽에서 수요가 많았다. 이러한 예술품은 대부분 인도 서부의 고아를 중심으로 생산되어 리스본을 통해 유럽에 들어온 것으로 여겨졌고, 루돌프 2세의 소장품집에도 인도의 작품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가비 모양 그릇> 이 그릇은 암석 조각품 중 독보적이다. 남부 독일 출신으로 추정되는 석공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용하던 산호석회암을 선택해서 마치 주름이 진 것처럼 보이도록 그릇을 만들었다. 산호석회암은 해양 동물 화석처럼 16세기에 학식 있고 과학에 관심이 있는 귀족과 인문학자들이 매우 귀하게 여기는 수집 품목이었다. 당시에 산호석회암은 그 생김새를 따라 '별 문양 돌(star stone)'이라 불렀다. 루돌프 2세 황제 역시 '별 문양 돌' 7점을 소장했고, 자신의 수집품을 모은 '예술의 방'에 진열했다.

마노 그릇(좌)과 조가비 모양 그릇(우)

<마노 그릇> 그릇 바깥 면을 두르는 소용돌이 띠무늬와 정교하고 얇게 깎은 가장자리는 오타비오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 그릇의 금속 장식은 'HC'라는 머리글자를 쓴 제작자가 한 것으로 작품의 받침대에 서명이 남아 있다. 이 제작자의 특징은 그릇과 받침대를 연결하는 도금 은제 장식에 투각 장식이 된 긴 암술대 모양의 장식을 더하는 것이다. 밀라노 출신 석공 오타비오 미세로니는 루돌프 황제의 요청을 받아 프라하에 공방을 차려 작업했고, 프라하가 유럽 석조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데에 일조했다.

 

<조가비 모양 그릇>을 장식하는 아칸서스 나뭇잎과 소용돌이 띠는 미세로니 가문의 공방에서 즐겨 사용했던 무늬 양식이다. 오타비오는 깎기 어려운 단단한 연옥을 사용했지만 마치 점토를 반죽한 것처럼 부드러운 형태의 그릇을 만들어냈다. 그릇 위에는 바다의 신 넵투누스(포세이돈)가 있는데, 은에 도금한 이 금속상은 오타비오가 사망한 후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한다. 루돌프 2세가 서거한 후 이 작품은 미완성 상태로 미세로니의 공방에 남겨졌다가 빈으로 옮겨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누워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좌)와 연수정 꽃병(우)

<누워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 다루기 까다로운 재로인 옥수(玉髓)한 덩어리를 인체 표현과 움직임을 정교하게 살려 만든 작은 조각상이다. 두 인물에 맞게 재료의 자연적인 색채를 그대로 살린 조각가의 방식도 놀랄만하다. 조반니 암브로조는 1600년부터 밀라노에 미세로니 가문 공방을 이끌었던 인물로, 당시 재료의 질감을 잘 살려 실력이 뛰어난 석공으로 평가받았다.

 

<연수정 꽃병> 하나의 큰 연수정 덩어리로 병의 몸통을 만들고 여기에 나뭇잎 무늬 입구와 손잡이, 받침대 금속 장식을 붙여 완성했다. 몸통에는 소용돌이 괴수 얼굴을 닮은 무늬가 교차하고 옆면의 손잡이 가장자리 부분에는 과일 바구니 무늬가 있다. 빛의 굴절과 반사, 투명도를 이용해 연수정의 특성을 살려 제작됐다. 루돌프 2세의 황실 석공 디오니시오 미세로니의 후기 작업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그는 오타비오 미세로니(1567~1624)의 아들로서 가업을 이어 궁정에서 일했다.

 

십자형 해시계

십자형 해시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장품으로 1619년 HD라는 머릿글자를 쓰는 공인에 의해 프라하에서 제작되었다. 도금된 구리합금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7.8cm, 가로너비는 12.1cm이다.

 

요새 다리와 물레방아가 있는 풍경

'보석 모자이크'는 특이한 유형의 보석 조각 예술로, 피렌체에서 유행하여 '피렌체 모자이크'라고도 불린다. 보석류 석판들을 형태에 맞게 깎아 조립하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었다. 코시모 카스트루치는 이 분야에서 유명했던 피렌체 출신 장인으로, 프라하로 이주해 보석 모자이크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공방을 설립했다. 그의 아들 조반니는 1610년에 황실 석공이 됐는데, 가족 공방에서도 일했다. 이 풍경의 제작자는 조반니로 추정된다.

 멀리 보이는 산맥에 우뚝 솟은 탑이 있는 성이 세워져 있고, 그 성채는 협곡 반대편에 있는 건물들과 다리 하나로 연결된다. 왼쪽 전경은 물레방아가 차지하고 있고, 오른쪽에는 배에 탄 남자가 보인다. 그 오른쪽 공간을 독특한 모양의 나무 한 그루가 둘러싸고 있다.

 

야자열매 주전자(좌)와 야자열매 잔

<야자열매 주전자> 16세기 유럽에 야자열매는 바다에서 자라는 나무 열매라고 알려지면서 낯설고 경이로운 물건으로 여겨졌다. 인도로 떠난 유럽인들은 항해 도중 야자열매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주전자를 장식한 물고기 모양 물의 정령은 야자열매가 바다에서 왔음을 암시한다. 또 야자열매가 해독 성분을 갖고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확산되기도 했다. 전 세계에 야자열매 장식품이 6점 있는데, 이 가운데 3점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집품이다.

 

<야자열매 잔> 17세기로의 전환기 대항해 시대에 유럽의 항해사들과 상인들은 외국에서 온갖 이국적인 물건들을 들여왔다. 낯선 물건에 값비싼 부속을 장식해서 만든 공예품들은 유럽의 예술 애호가들과 수집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유럽인은 야자열매를 해독제와 치료제로 여겼기 때문에 야자열매를 잔으로 변형시킨 작품이 ㄷ물지 않게 제작됐다. 뚜껑에는 '란츠크네히트'라고 부르는 16세기 용병 복장을 한 작은 인물상이 있다.


매혹의 명화를 수집한 예술의 도시 빈 작품들은 다음 3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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