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깊은 사찰에 무슨 배가 있단 말인가? 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느새 배 위에 올라타 피안(彼岸)의 세계로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반야란 지혜를 가리키며 모든 미혹을 끊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힘이나 모든 법을 통달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작용을 뜻한다. 세차고 사나운 바다를 건너려면 반드시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마찬가지로 생사고해의 험한 바다를 헤쳐가려면 반드시 반야의 지혜가 있어야만 열반의 피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생사의 고해에 빠져 헤매는 중생을 열반의 피안으로 건너주는 배가 곧 반야용선이다. 즉 다시 말하면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의 극락세계로 중생들이 건너갈 때 타고 가는 배를 말한다.
반야용선 개념은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전란 중에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간 마당에 믿고 의지할 다른 그 무엇을 찾는 게 반야용선이다. 사찰이나 전각을 생사고해를 넘어 피안의 극락정토에 이르게 하는 배, 반야용선으로 본 것이다.
사찰이나 전각이 배가 되니 주변은 온통 바다다. 바다에 수중 생물이 없을 수 없다. 게,물고기,거북이 등장하는 이유가 된다. 목조 건물로 화재 피해가 컸던 사찰로서는 용왕이나 수(水)신을 받들어 화재로부터 멀리하고자 하는 바램의 기원이 담기기도 했다.
경상북도 청도에 가면 대적사라는 사찰이 있다. 대적사는 신라시대 876년 보조선사가 토굴에서 창건한 곳으로 고려 초 보양국사가 중창했다. 1592년 임진왜란때 화재로 폐허가 된 사찰을 1635년 초가 3칸을 짓고 대적사로 이름 지었다. 대적사는 작은 사찰로 대웅전도 없고 극락전, 명부전, 산령각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대적사는 극락전이 유명한데 극락전 정면에 보이는 쌍룡은 용선을 의미하며 기단 축대는 바다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용이 배를 이끌고 극락세계를 항해하는 모습이다. 사찰 건축에서는 용선을 법당에 비유하고 기단을 선체로 상징하는데 이곳 기단에 새겨진 바다 생물들로 반야용선임을 알 수 있다.
기단 앞 돌계단 입구에 아기 거북 한 마리가 기어오르는 모습이 양각되어 표현되어 있으며, 아기 거북을 시작으로 돌계단과 기단부에 많은 수중생물이 표현되고 있다. 전가을 받치고 있는 기단과 기단으로 이어진 사다리 문양은 배의 용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큰 거북이가 뒤쳐진 작은 거북이를 몰고 데려가는 모습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나타낸다. 거북이 밑에는 게가 있고, 옆 기단에는 연꽃인 듯한 꽃 속에서 어린 거북이가 놀고 있으며, 이렇게 기단에 새겨진 거북이와 게 등은 산속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드문 사례이다.
또 다른 사찰 청도 운문사에는 운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비로전 천장 대들보에 매달려 있는 용가(龍駕)가 있으며, 이는 영가천도를 위한 의식구로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어렵다. 의식을 집전하는 스님이 용의 앞머리 고리에 매단 줄을 당겼다 놓으면 용이 좌우로 크게 움직여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간다는 느낌을 준다고 한다. 밧줄에 매달려 있는 보살은 자식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로 그만 너무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보살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용선이 떠나고 있었기에 보살은 배에서 던져준 밧줄에 악착같이 매달려서 서방극락정토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를 악착보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외에도 보물 제2024호 천은사 극락보전에는 귀공포 위의 청룡, 황룡의 꼬리가 법당 뒤쪽 귀공포 좌우에 조각되어 있고, 보물 제396호 여수 흥국사 대웅전, 미황사 대웅보전 기단부에도 수중 생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통도사에는 극락보전 외벽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반야용선도가 그려져 있으며,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고, 또한 극락전이 서방정토, 깨달음의 세계와 연관된 전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벽화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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