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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2)

by 3000포석정 2023.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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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華嚴寺)

민족의 명산, 지리산 남서쪽 끝에 자리 잡은 전남 구례에는 화엄종의 본산인 천년고찰 화엄사가 자리 잡고 있다. 화엄사는 승병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이 탔다. 인조와 숙종 때 다시 지었으며, 이때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목조건물인 '각황전'을 건립했다.

 

화엄사 사적기에 따르면 창건 연대가 추정만으로 이어져 오다 화엄사가 화엄 사상의 근본 도량이 된 중요한 계기는 의상대사 보살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유학 후 귀국, 화엄사상을 알리면서 곳곳에 화엄도량을 창건 중수하였는데 이 시기에 화엄사도 중창됐다고 한다. 이후 경덕왕(742~764) 시절에 8가람, 81암자를 둘만큼 대사찰로 확장돼 '남방제일 화엄대종찰'로 우뚝 서게 됐고, 조선 시대인 1426년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했다.

 

 

 

화엄사 각황전은 숙종의 비였던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가 자기의 아들 연잉군이 왕이 되기를 기원하여 대화주 보살 역할을 자원하면서 지어졌다고 한다. 연잉군은 숙빈 최씨의 아들로 52년간 재위했고 83세까지 장수한 조선의 최장수 왕 영조이다.

사적기와 민간에 내려온 설화에 따르면 숙종의 비였던 숙빈 최씨의 첫째 아이가 장희빈의 저주와 구박을 받아 일찍 죽은 뒤 숙빈 최씨가 명찰(名刹)을 찾아 정성으로 득남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이가 영조이다. 숙빈최씨는 아들인 연잉군 세자가 조선의 왕이 되기를 축원하며 지리산 화엄사의 계파스님과 함께 각황전을 복원했다. 각황전은 경복궁의 근정전보다도 더 큰 건물이다. 각황전의 상량문에 의하면 대시주자가 바로 숙빈최씨와 연잉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조와 인연이 깊은 사찰은 화엄사와 대구 파계사이다. 화엄사는 숙빈 최씨가 아들이 조선의 왕이 되기를 축원하며 각황전의 대시주자로, 파계사의 용파스님의 도반 농산 스님이 죽어서 영조로 환생했다는 것이다. 영조 대왕의 소식과 채식, 검소한 생활과 백성을 살피는 마음들은 전생에 닦은 불심의 인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각황전과 관련한 설화가 또 있다. 장륙전 중건을 위하여 100인의 승려들이 대웅전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는데, 성능스님은 성취를 위하여 공양주(供養主, 밥을 짓고 살림을 맡아함)를 자원하였다. 백일기도가 끝나는 회향일(廻向日)에 한 노승의 꿈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서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으로 화주승(化主僧)을 삼아야 불사를 이룰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100인의 대중이 모두 시험한 결과 성능(聖能)만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아 화주승이 되었다. 성능은 화주 할 걱정에 대웅전에서 기도를 올리는데 "다음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는 문수보살의 말씀이 들렸다. 그러나 다음날 처음 만난 사람은 절에 자주 들르는 거지 노파였다. 그 노파는 성능에게 시주를 요구받자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환생하여 큰 불사를 이루겠나이다." 하며 서원을 세운 뒤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 뒤 성능은 5~6년을 걸식하여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한양 창덕궁에 이르러 마침 유모와 함께 궁 밖을 소요하던 공주와 마주쳤는데, 공주는 우리 스님이라면서 반가워하였다. 공주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손을 펴지 않았는데 성능이 이를 펴보니 손바닥에 '장륙전' 2자가 쓰여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성능을 도와 장륙전을 완성하게 하였고, 사액을 내려 각황전(覺皇殿)이라 하였다 한다.

 

<구례 화엄사 대웅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화엄사는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까지 3개의 문을 지나면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은 보물 제299호로서 조선 중기에 조성된 삼신(三身)과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보물 제1363호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이 있다. 대웅전 현판은 선조의 서자 의창군 이광의 글씨로 여러 사찰에서 번각할 정도로 유명했다. 「지리산화엄사」 일주문 현판도 이광의 글씨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보제루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각황전은 단청으로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 더욱 고상하고 아름다운 전각이다. 각황전은 원래 3층이었던 장륙전을 중건하면서 2층으로 지었다. 1699년 공사를 시작해 1702년에 완공했다. '장륙(丈六)'은 '1장 6척'의 준말로 480cm 규모로 거대한 불상을 뜻한다. 건물 외관은 2층이지만 내부는 통층이다. 일곱 분의 불보살을 모셨는데 맨 왼쪽부터 관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석가여래, 문수보살, 다보불, 지적보살이다. 대웅전에서 협시불이었던 석가여래가 여기선 주존불로 봉안됐음을 알 수 있다. 「각황전」 현판 글씨는 숙종 때 최고 명필이었던 형조 참판 이진휴가 썼다.

 

 

 

 

각황전 앞 석등은 통일 신라 때 제작한 것으로 높이 6.4m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국보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ㆍ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화엄사 석등(좌)과 4사자 삼층석탑(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오른쪽 작은 탑은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 이것도 보물이다. 각황전과 영산전 사잇길로 오르면 또 하나의 불후의 명작을 만난다. 효대라 불리는 곳의 4사자삼층석탑이다. 화엄사를 상징하는 건물이 각황전이라면 화엄사를 대표하는 유물은 4사자삼층석탑이라 할 수 있다. 사자 네 마리가 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데, 탑은 부처를 상징하므로 부처가 사자좌에 앉았음을 뜻한다. 4사자삼층석탑은 한 단계 진보한 명작이라 하겠다.

앞쪽에는 석탑과 마주 보고 있는 공양탑이 있는데, 이 석등의 중심에도 인물상이 존재하는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또한 스승과 제자라는 설 등 다양한 해석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모진 세월을 겨디며 화엄사상을 꽃피운 화엄사에 또 다른 위기가 닥친다.

 

▣ 화엄사를 전소시켜라!

 

<차일혁 총경, 경찰청>

 

1950년 6.25 한국전쟁을 전후로 지리산은 남부군, 빨치산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당시 제18전투경찰 대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1920~1958)에게 빨치산 소탕 명령이 떨어졌다. 빨치산들의 은신처를 없애기 위해 '화엄사를 전소시켜라'는 유엔사령부의 명령이 하달됐다. 항일운동가 출신 차일혁 총경은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 "절을 불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다시 짓는 데는 천년이 걸려도 부족하다."며 명령을 거부했다. 차일혁은 묘안으로 각황전의 문짝 하나만 떼어내서 불태우는 것으로 화엄사를 지켜냈다. 국보 제67호 각황전을 비롯하여 4점의 국보와 8점의 보물, 다수의 지방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이 있는 문화유산의 보고 화엄사를 지킨 차일혁 총경의 문화재 사랑이 지켜낸 것이다.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대가로 차일혁 총경은 한직을 전전하다 1958년 공주경찰서장으로 재직 중 생을 마감했다. 1998년 화엄사 부도전 맞은편에 공적비가 세워졌고, 2008년 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을 추서 하였다.

 

해인사 이야기는 다음 기행에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1)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3)

100대 명산, 지리산과 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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