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은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자 퇴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프랑스 사람들의 자존심과도 같은 파리를 초토화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어다.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는 앵발리드기념관에 2톤의 폭약을, 유서 깊은 노트르담 사원에 3톤의 폭약을,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 등 파리 곳곳의 유명한 유적들마다 각종 폭파장치를 설치해 놓았다. 독일 총통 히틀러는 파리 주둔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 1894~1966) 중장에게 "파리가 연합군에게 점령되면, 후퇴할 때 파리의 모든 기념물 및 주요 건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파리에 있는 호텔 무리스는 매우 유서 깊은 호텔이다. 1944년 8월 독일 점령 당시 독일의 파리 사령부였던 곳으로써 그 당시 이곳을 지키고 있던 콜티츠는 히틀러부터 파리를 불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받고서도 그는 명령을 어긴 채 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1944년 8월 25일 히틀러는 파리를 불태워버리라는 자기 명령을 재촉하면서 곁에 있던 알프레트 요들 장군에게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요들 장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대답이 없었다. 파리 점령관 콜티츠 장군이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과 수많은 유적을 한 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생각을 하니 인류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법죄를 짓는 것 같아 콜티츠는 도저히 명령을 매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히틀러보다는 하늘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징역을 살았으나 파리를 지킨 공로가 인정되어 2년만 복역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21년이 흐른 1966년 여름 콜티츠가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눈을 감았을 때 무엄 앞에는 파리를 구하기 우한 그의 노력에 뒤늦게 감사하며 꽃을 바치려는 파리 시민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 전쟁 중에도 문화 유산을 지킨 사찰
우리나라 사찰도 콜티츠와 같은 군인들이 있기에 불타지 않고 세계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금 후손들이 볼 수가 있다. 화엄사와 해인사가 콜티츠와 같은 우리나라 군인들에 의해 지켜진 소중한 사찰이라면, 상원사는 스님과 이름 모를 군인에 의해 불태워지지 않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낸 사찰이다.
1950년 6.25전쟁은 민족의 비극이었고 그 전쟁으로 민족의 분단은 더욱더 고착화되었고, 남북 간의 이념 대결이 극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문화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실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북진을 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하였다. 마침내 국군은 38선상에서도 중공군의 총공세 밀려 다시 남쪽으로 후퇴를 하였고 주민들도 다시 피란을 가야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1.4 후퇴이다. 북한군이 주둔할 수 있는 시설을 최대한 소각하기 위해 군인들이 상원사에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나야 죽으면 어차피 다비(茶毘)에 붙여질 몸이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오세요!"
"너희들은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의해 불을 놓은 것이니 불을 놓으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제자로서 마땅히 절을 지켜야 돼. 너희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명령을 따라 절을 지키면 되지 않느냐? 본래 중들은 죽으면 당연히 불에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이도 많고 죽을 날도 멀지 않았으니 잘된 것 아니냐. 그러니 걱정말고 불을 질러라."
절의 소각을 전해들은 한암스님은 장교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서는 방에 들어가서 가사 장삼을 입고, 법당의 중앙에 가부좌를 하였다. 그리고는 장교에게 이제 되었으니 불을 놓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노승과 장교는 상원사 소각을 놓고 눈에 핏발이 선 대결을 하였다. 장교의 옆에 있는 사병이 "이제 끄집어낼까요?"라고 말을 하였다. 당시 이 장면을 지켜본 한암스님의 상좌와 보살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장교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부탁하였다. 잠시 후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한 장교는 "이 스님은 보통 스님이 아니다. 도인 스님이 분명해."라고 말을 하면서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 법당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장교는 절을 태웠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 절의 문짝을 태워 연기라도 내야 하겠다는 양해를 노승에게 얻었다. 장교는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의 문짝 수 십여 개를 떼어서는 마당에 놓고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상원사에 불이 난 것처럼 보였다. 문짝을 다 태운 장교는 불을 놓았다는 증거로 노승이 옻칠한 깨진 죽비 하나를 가지고 상원사를 내려갔다. 한암스님의 생사불 이적인 생사관에서 기인한 절을 수호 정신으로 상원사는 기적적으로 소각을 면한 것이다. 당시 한암스님의 말을 듣고 소각 중지 명령을 내린 그 중위의 신상은 전하지 않고 있다.
한암스님의 죽음으로 맞선 기세와 지혜로운 국군 장교의 결단으로 상원사는 건재하였다. 그로 인하여 상원사의 문화재, 상원사 동종 <국보 제36호>, 문수동자상 <국보 제221호>, 상원사 중창권선문 <국보 제92호>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나중에 방문하게 되면 꼭 잊지 말고 우리 문화를 지키려는 숭고한 정신도 같이 기억했으면 한다.
비단 상원사 뿐만 아니라 구례 화엄사, 합천 해인사도 전쟁 중에도 콜티츠 같은 우리 군인들이 천년을 이어온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지킨 사찰이다.
화엄사와 해인사 이야기는 다음 기행에서....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2)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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