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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정족산성과 우리나라 최고로 오래된 사찰(1)

by 3000포석정 2023.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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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6년 1월 초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때 탄압을 피하여 탈출했던 3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리델이 7월 청나라의 텐진으로 탈출해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리고 이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1846년, 1847년 두 차례 조선을 침략했다가 실패했던 프랑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데, 프랑스의 실제 속셈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는 데 있었다. 리델의 보고와 보복 요청을 받은 프랑스는 로즈 제독에게 조선 침략을 명령했다.

 

병인양요의 시작

로즈의 군함은 1866년 11월 17일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 왔다. 프랑스군은 20일 강화를 점령하고 서울에 이르는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여 조선 정부를 궁지에 몰아 항복을 받을 속셈으로 한강을 봉쇄했다. 강화를 점령한 로즈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조선인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속히 관리를 자신에게 보내 통상조약을 맺게 하라고 조선 정부를 협박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경하ㆍ이용희ㆍ양헌수를 각각 대장ㆍ중군ㆍ천군총에 임명하여 강화 수복을 시도했다. 그러나 12월 2일 문수산성 전투에서 신식 무기와 화력에서 우세한 프랑스군에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급히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을 임명하여 이에 대항하게 하였는데, 그는 경기, 황해도 일대에서 총을 잘 다루는 포수들 370여 명과 순무영의 병사 100여 명을 합하여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출발하여 10월 18일 강화도 건너편에 있는 김포의 통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강화의 갑곶나루 일대를 이미 프랑스군이 차지해 강화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에 양헌수는 덕포부근에서 거느린 병력이 매복할 만한 곳을 찾은 끝에 정족산성이라는 고성이 있는 것을 알아내고 지세가 험준하여 동쪽과 남쪽 두 길만 통행이 가능한 천연의 요새가 있는 걸 확인하였다.

 

<산성 안에서 바라본 정족산성 남문>

 

정족산성 전투

이에 프랑스 로즈 제독은 11월 19일 조선군의 정족산성 입성 정보를 받고 올리비에 대령에게 병력 150명을 주어 정족산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쉽게 점령하였으므로 조선군을 얕보고 성을 공격하는 데는 대포가 필요하였으나 별 준비도 하지 않고 정족산성에 도달하였다.

 

프랑스군의 화력은 조선군에 비해 화승총 발사 거리가 훨씬 길고 삭격 속도도 빠른 최신식 개인 화기를 보유하여 화력으로는 조선군이 상대가 되지 않으나 조선군을 얕잡아 보고 대포도 가져오지 않았고 지형상 조선군이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병력수도 많았기 때문에 전세는 조선군이 우세한 입장이었다. 프랑스군은 전사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조선군의 정족산성 승리는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2월 17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프랑스군은 강화산성 안에 있던 외규장각에서 수백 권의 서적(조선 왕조 의궤 등)과 무기, 금은괴 등을 약탈해 갔다. 민가의 절반 이상을 불태웠다. 당시 로즈 제독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약탈 물품은 359점에 달했다. 이렇게 병인양요는 역사상 처음으로 서구 제죽주의 침략 세력을 격퇴하였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크며, 만약 이때 정족산성에 승리하지 못했다면 전등사 경내의 정족사고를 지키지 못해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도 분실되거나 약탈되었을 것이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외규장각 의궤 반환

이후 이렇게 약탈된 문화재에 대해 큰 관심 없이 지내다가 박병선 박사에 의해 약탈되어 갔던 외규장각 의궤(의식과 궤범의 합친 의미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임)가 프랑스 도서관에 있다는 것을 알고 반환 운동이 일어났다.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약탈 도서 하나를 들고 와서 협상에 임했고 의궤 중 하나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상)를 돌려주었다. 외규장각 의궤 이전에 이제까지 약탈 도중에 돌아온 것은 이 한 권이 유일하다. G20 정상회담(2010년 11월 12일)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반환을 약속했고 145년 만에 2011년 4월 14일 드디어 반환되어 돌아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강화도 전등사 사찰 기행은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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