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여행지에서 빠질 수 없는 코스로 전등사를 꼽을 수 있다. 고구려 때 창건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임에도 불구하고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아 전국적으로 유명세는 그리 높지는 않다. 하지만 전등사는 고려시대에는 원나라의 침략을 피해 고려 왕실이 강화로 천도해 왔을 때 원찰이 되기도 하고 조선시대에는 정족산 사고도 있어 사찰의 역사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전등사를 보기 위해서는 정족산성 내로 진입해야 하는데 남문으로 올라가는 문과 동문으로 올라가는 문이 있는데, 편히 올라가기 위해서는 남문 주차장 방향에서 올라가면 된다. 매표소를 통과하면 바로 성문을 볼 수 있는데 여기가 바로 정족산성의 남문이다. 정족산성은 고려시대 이후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과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방어 역할을 한 성곽시설이다. 정족산은 5개의 산봉우리로 이어져 있는데, 산의 지형을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북쪽과 남쪽의 고도 차이가 큰 편이고 1시간 30분 정도면 성곽 둘레길을 볼 수 도 있다.
전등사 역사와 유래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 아도화상이 진종사(眞宗寺)로 창건했다고 한다. '진종(眞宗)'은 여래의 진실한 가르침인 불교를 말한다. 먼저 전등사의 일주문 격인 남문으로 들어가면 성루의 이름이 종해루(宗海樓)인데 '종해'또한 모든 강물이 바다에 들어와 한 맛을 내듯 불교는 모든 것을 포용하여 진리로 나아가게 한다는 뜻이다.
700년 가까이 된 은행나무 보호수가 있는 데 까지 올라가다 보면 '전등사(傳燈寺)' 편액이 걸린 대조루가 나온다.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가 대장경과 옥등(玉燈)을 시주한 이후 전등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전등'이라는 말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 나온 말로 부처님의 정법안장이 스님에게 전해지는 방식을 등불에 비유한 말로 지혜의 등불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뒤편에 대조루(對潮樓) 편액이 걸려 있는데 '대조'는 부처님은 조수(潮水)처럼 때에 맞는 음성으로 대중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전등사 불교 문화유산
보물 제178호인 대웅보전은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모두 타 버려 광해군 13년(1612)에 새로 지은 전각이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 약사불과 아미타불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1785호)을 모셨다. 중앙 천장에서 내려온 청동 등잔 받침은 옥등으로 불을 밝힌 정화 궁주의 등 공양을 생각하게 해 전등사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대웅보전 내부 건축물은 보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대웅보전에는 부처님께 꽃을 바치는 새들의 조각이 있어 특이하다.
부처님에게 바치는 꽃 공양은 크나큰 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새들도 다투어 꽃 공양을 올리고 있으며, 대웅보전에는 특이한게 다른 사찰 대웅전에는 없는 '업경대'가 존재한다. '업경대'는 염라대왕이 망자의 죄를 비추어 보는 거울로 황색 사자와 청색 사자 한 쌍으로 되어 있다. 나무로 만든 사자의 등 위에 커다란 불꽃 문양으로 둘러싸인 거울이 꽃혀 있는 형태이다. 보통 '명부전'에 있어야 할 게 대웅보전에 있는 것이 부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전등사 대웅보전 외부의 네 모서리에는 60cm 크기의네 마리의 원숭이가 사각형 연화받침 위에 무릎을 세우고 서쪽은 두 손으로, 동쪽은 한 손으로 지붕을 받들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조각상에는 두 가지 이야기 들이 전해 온다.
첫 번째는 나부상에 관한 이야기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의 대웅전 건축을 담당한 도편수가 있었다. 그는 공사 도중 한 주막의 주모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도편수는 자신이 돈을 벌 때만다 주모에게 건네주었다. 도편수는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여인에게 돈을 주었다. 도편수는 어느 날도 다름없이 주모를 생각하며 대웅전 공사를 하고 있었다.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그가 주모를 찾아갔으나 여인은 온데간데 없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렸다. 도편수는 여인에 대한 배신감에 화가 치밀었따. 그의 분노는 작업 현장인 대웅전 공사까지 전해졌고 대웅전 공사가 끝났을 때에는 대웅전 네 귀퉁이의 처마 밑에는 나부상이 만들어졌다. 두 번째는 원숭이상에 관한 이야기다. 이 원숭이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끝었는 공경을 나타내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육도집경』에 전생에 부처님은 500마리 원숭이의 왕이 되어 원숭이 무리를 죽음으로부터 살려내고 자신은 국왕에게 잡혀 "벌레 같은 몸뚱이의 썪어질 살이오나 가히 왕에게 바치어 하루 아침의 반찬이 될까 합니다."하여 국왕을 감동시킨 이야기가 있다.
또한 전등사에는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중국종 '범종'이 있다. 북송 철종 4년(1097)에 주조된 중극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다. 중국 종이 전등사에 오게 된 사연은 이렇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전쟁 물자 공출을 위해 전등사 범종을 수탈해 부평 병기창으로 가져가 버렸다. 일본의 항목으로 전쟁이 끝나자 전등사 스님은 범종을 찾으러 부평 병기창에 갔지만 전등사 범종은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철로 주조된 중국 종이 있어 전등사로 가져와 아침 저녁으로 부처님 음성을 중생들에게 들려주었다.
정족산성 사고
전등사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 100m 정도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자리 잡고 있다. 1678년부터 1930년까지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가 있어 승군 40명이 항상 지켰다. 원래 사고는 임진왜란 전에 기록을 보전하기 위해 내사고이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중 등 외사고가 있어 4개소였으나 전주 사고만이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 버렸다.
그 후에는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서 선조 39년인 1606년 4월에 복원 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이던 원본은 마니산 사고에 보관이 되고 나머지 4부는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사고에 각기 봉안이 되었다. 그러나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 당시 피해와 효종 4년이던 1653 년 11월 실화사건으로 1660년에 삼랑성 전등사 경내의 정족산사고로 옮겨 1678년 이래로 서적을 보관하였다.그 후 전등사는 사고를 지키는 중요한 사찰로서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에는 광복이 되면서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그 후 정족산 사고는 1930년 전후에 파손이 되어서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강화도가 문화 사업으로 복원, 정비해서 지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복원이 되어엇 옛 것의 정취는 느낄 수 없지만 역사를 알고 보면 사찰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정족산성과 우리나라 최고로 오래된 사찰(1)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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