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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영주 부석사, 신라시대 유학파와 국내파가 창건한 사찰(3)

by 3000포석정 2023.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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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가 소재해 있는 영주시는 '소수서원', '부석사'와 함께 두 개나 되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고장이다. 부석사 경내와 부속 건물에 있는 각종 건축물과 석탑은 보통 국보 아니면 보물급 유산들이다.

 

부석사 역사와 유래

태백산맥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8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와(재위 661~681) 때 짓고,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ㆍ수리 공사를 하였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우리나라 불교 화엄종을 처음으로 도입한 신라 고승 의상대사(625-702)는 신라 왕족의 신분으로 경주 황복사에 출가하여 20세에 불문에 귀의하였다. 그가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 유학길에 나선 시기는 진덕여왕 4년(650)의 일로써 그의 나이 26세였다. 원효와 헤어진 후 서기 661년에 의상이 중국 땅을 밟은 곳은 산둥반도 북쪽 등주였는데 그는 독실한 불교신도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선묘낭자에 얽힌 설화

이 집에서 아름다운 처녀 선묘가 살고 있어 훗날 신라 승려 의상과 인연을 맺게 되지만 의상이 여자를 멀리하므로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의상은 중국 화엄종 2대 조사 지엄스님에게 화엄 사상을 배웠고 그 무렵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는 낌새가 보이니 671년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등주 항구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는 자기가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고자 바닷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의상이 떠나자 함께 따라갈 수 없게 되어 선묘는 자신이 용이 되어 달라고 하늘에 빌면서 황해바다에 몸을 던졌다. 하늘이 이에 감읍하여 선묘는 용이 될 수 있었고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면서 신라까지 무사히 보살폈다고 한다.

 

 

 

의상이 귀국 후 처음 세운 절은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이고 그 다음이 태백산 근처 봉황산 아래 지은 부석사이다. 문무왕의 부름알 받고 경주에 내려가 명산대천에 사찰을 지으라는 분부를 받고 절터를 정한 곳이 곧 부석사이다. 그는 문무왕 10년(676)에 이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미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사는 5백여 명의 다른 종파의 불승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의상은 마음속으로 부처님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자 갑자기 하늘에서 바위로 변한 선묘의 용이 나타나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반대하는 불승들을 향하여 내리칠 듯 위협하니 그들은 두려워서 달아나고 종국에는 굴복하여 새 절을 짓는데 협조하게 되었다. 어리고 착한 선묘의 넋이 용이 되어 의상을 보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용이 된 것이다. 선묘가 바위가 되어 땅에 내려앉은 바위를 부석이라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지어진 이 절의 이름을 부석사라고 지었고 부석사 탄생과 함께 이 땅에 화엄종찰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듯 의상대사는 원효대사와는 다르게 왕실의 적극적 지원으로 대찰(大刹)을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

 

부석사 주요 불교 문화유산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의상대사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경주에서 먼 곳에 사찰을 창건했다고 하는 것은 왕의 후원 또는 지시로 삼국 통일 직후 삼국이 국경을 맞댔던 태백산과 소백산 일대에서 삼국의 주민을 통합하고 당나라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한 '전략적'창건일 수 도 있다. '화엄(華嚴)'은 대립이 아닌 하나로써 조화로운 연화장의 세계를 뜻하니 신라가 삼국 통일 후 추구했던 바이다.

 

부석사는 비교적 평지에 조성돼 있는 여타 사찰과 달리 계단식으로 고도를 높여가며 자리하고 있다. 야트막한 은행나무길을 시작해 일주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계단길이 시작된다. 계단을 오르면 아름다운 목조건물이 나타난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누각 '범종루'다. 돌계단 위로 솟은 범종루가 마치 극락정토로 들어가는 관문처럼 느껴진다.

 

<부석사 안양루,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범종루 밑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이번에는 더 높은 계단과 함께 이층 누각 '안양루'가 나타난다. 마지막 관문이다. 안양루는 오르는 돌계단이 높기도 하지만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진다. 그래서 훨씬 높아 보인다.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면 이번엔 석등과 함께 부석사의 중심건물 무량수전이 단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안양문은 '안양(安養)'은 곧 '극락(極樂)'을 의미한다. 무량수전이 있는 이곳이 다름 아닌 극락세계인 셈이다. 고려 중기 때 세워진 걸로 추정되는 무량수전(국보 18호)은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단청이 없는 건물은 배흘림기둥[1]과 주심포[2] 양식에 창호는 기본적인 정(井)자 창살이다. 특히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는 부처는 특이하게도 건물 중앙에 아닌 왼쪽에 모셔져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아미타불을 모셨고 협시불 없이 독존불로 봉안한 것은 어느 사찰에서도 보기 드문 모습이다. 부처의 시선 또한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서방 정토에서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의상이 "일승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아니하고 시방정토로서 죽음이 없기 때문에 좌우 협시불도 탑도 세우지 않는다."고 말한 내용이 이유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은 이보다 훨씬 앞선 통일신라 시대 석등(국보 17호)으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무량수전 오른쪽 뒤편에는 창건 신화의 주인공 선묘 낭자를 모신 '선묘각'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경내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조사당이 나오고 그 앞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가 보인다. 부석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른바 선비화(選扉花)라는 나무다.

 

 

 

부석사를 창건한 뒤 천축국(인도)에 가려고 했던 의상 대사가 평소 지니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일이 날 것이다. 이것을 보고 내 생사를 살피면 된다." 지팡이는 말 그대로 뿌리를 내렸고 지금도 사시사철 때가 되면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이 선비화 잎을 삶은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한때 너나없이 나뭇잎을 따 가는 바람에 고사 위기에 처했었다고 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지금은 땅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조사당 건물은 국보로서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는 곳으로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 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부석사 조사당 내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1] 목조건축의 기둥을 중간 정도가 직경이 크고 위 아래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 만든 기둥

[2] 목조건축 양식으로 기둥 바로 위에 짜 놓은 공포

 

영부(봉황산) 부석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43)-국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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