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계곡은 여름 물놀이로 상당히 유명한 계곡이다. 일대 지역이 묶여 명승 제66호로 지정되어 있고 대흥사 옆에 천연기념물 왕벚나무 군락지도 있어서 대흥사 숲 산책로를 '땅끝 천년 숲 옛길'이라 부르다.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서, 서ㆍ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 대흥사와 초의선사
초의선사는 조선후기의 선승으로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정립하였다. 초의선사는 15세에 출가하여 60여 년간의 수행과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 당대의 지식인들과 각별히 교유하며 다도(茶道), 시(詩), 서(書), 화(畵) 등 전통문화와 불교, 유교, 도교 등에도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24세(1809년) 때 강진에 와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과 처음 교류하고 유서(儒書)와 시부(詩賦)를 익혔다. 30세 되던 해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와 추사 김정희, 김명희, 김상희 형제와 정약용 아들인 정학연, 정학유 형제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선사는 차츰 자신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은거의 뜻을 갖고 39세 때 전남 해남 대흥사 동쪽 계곡에 일지암(一枝庵)을 지어 그 후 일생을 보내는 근거지로 삼는다. 43세 때 지리산 칠불암에서 '다신전(茶神傳)'을 등초하였고, 45세 때 이를 정서(正書)하였으며 52세 무렵에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차생활의 멋과 우리 차의 우수성을 꽃피었다.
또한 다성(茶聖) 초의와 서성(書聖) 추사와의 교유 또한 각별하여 평생을 통해 지속되었는데 두 사람은 동갑나기로서 서로가 서로를 드높여 주는 남다른 사이였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초의는 당시 험난한 뱃길을 건너 세 차례나 제자 소치 허유를 통해 추사에게 손수 법제한 차를 보내고 추사는 초의에게 글을 써 보내기도 하였다. 71세 되던 해 10월에는 42년간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어 온 김정희가 과천 청계산 아래에서 유명을 달리하자, 그의 영전에 제문을 지어 올리고 일지암에 돌아와 쓸쓸히 만년을 보냈다.
▣ 대흥사의 아름다운 불교 건축물
대흥사는 일반적인 사찰의 가람 배치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는 독특한 공간구성이 있는 사찰이다. 넓은 산간 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남원(천불전, 용화당, 세심당 등)과 북원(대웅보전, 침계로 등) 그리고 별원(표충사, 대광명전, 성보박물관)의 3 구역으로 나뉘어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두륜산 대흥사 현판이 새겨진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접어들면 이르게 되는 부도원이 있다. 절집을 지켰던 스님들의 무덤이다. 대흥사 부도원은 국내 최대의 부도가 봉안돼 있다고 알려질 정도이다. 사적비를 비롯해 초의선사 부도탑, 국가보물로 지정돼 있는 서산대사 부도도 이곳에 모셔져 있다. 현재의 대흥사를 있게 해 준 선조들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그 어떤 선조보다 대흥사와 인연을 맺고 있는 인사가 초의 의순스님이다. 그의 부도 앞에 '草衣塔(초의탑)'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차의 성인으로 추앙받으며 조선중기 불교의 가르침을 한층 선양시킨 어른이다. 한 시대를 살다 간 인사가 어떤 흔적을 남길까 생각되지만 초의선사의 발자취는 후대에도 그 길이 오롯하게 남아 있다. 그뿐이 아니다. 청허당 휴정스님(서산대사)도 부도와 함께 남아 있다. 외세이 침입에 대항해 민초들의 안위를 구한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이름으로 분연하게 일어난 수행자, 불교계율의 개차법(開遮法: 조건과 상황에 따라 적용하고 적용하지 않는 열고 닫는 법칙)에 따라 "악을 행하는 자는 정법의 칼로 물리치라"는 『열반경』의 가르침과 연결돼 있다.
천년고찰 대흥사는 매표소부터 대흥사까지 진입로가 3km 정도이며 빼곡한 나무들이 숲터널을 이룬다. 신록의 푸르름이 아름드리나무 숲에 솔바람 소리로 일렁이며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산사 순례』편에서 대흥사 십리 숲길을 극찬했다. 숲터널을 지나면 가장 먼저 해탈문을 볼 수 있다. 해탈문은 오욕칠정(五慾七精)에 물들고 세태에 찌든 속세의 모든 업으로부터 벗어나 안락함과 평온함이 전제되는 불보살의 세계로 들어서는 문이다. 보통의 사찰에는 사천왕상이 있는데 대흥사는 멀리 북쪽의 월출산, 남쪽의 달마산, 동쪽의 천관산, 서쪽의 선은산이 사방을 호위하여 풍수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에 별도의 사천왕이 없고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사천왕을 대신하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서산 휴정, 사명 유정, 뇌묵 처영 등 구국삼화상(求國三和尙)이 부처님의 법을 받들어 나라와 백성들이 지켰기 때문이다.
대흥사 북원구역 입구인 침계루로 들어가면 대흥사의 주불전인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건물 상부에는 '대웅보전'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부처님이 큰 걸음으로 내딛는 듯한 '大', 영웅처럼 단단한 '雄' 보배가 지붕을 뚫고 나올 것 같은 '寶', 중생이 부처님을 따르는 듯한 '殿' 등 힘찬 글씨이다. 글씨만 보더라도 원교(員喬) 이광사는 22년간 계속된 유배지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 귀향길에 들른 추사 김정희는 "원교의 대웅보전 편액을 한 번 훑어보았는데 만약 원교가 자처해서 써 준 것이라면 너무도 전해 들은 것과는 같지 않고, 원나라 명필 조맹부의 서체를 타락시킴을 면치 못했으니 나도 모르게 아연 비웃을 수밖에 없다"하여 떼라고 했다. 초의선사는 대웅보전 편액을 내리고 추사로부터 현재 성보박물관에 있는 '무량수각'이란 글씨를 받아 전각에 걸었다.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 고통스럽고 힘든 나날을 10개의 벼루와 100자루의 붓이 닳아 없어지도록 글씨를 연마한 결과 추사체를 완성했다.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대흥사에 들려 초의선사에게 지난날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하고 다시 이광사가 쓴 편액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조선 4대 명필로 손꼽히는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로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의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이다.
남원구역의 출입문이 가허루를 지나면 천불전을 볼 수 있다. 천불전 내부에는 초의스님을 비롯한 8분의 스님들이 경주 불석산에서 직접 깎아 제작 운반해 온 옥돌로 만든 불상 천분이 모셔져 있다. 중앙에 있는 삼존불은 목조불이다. 이 천불은 1817년 배로 싣고 오던 중 부산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일본 나가사키로 표류했다. 일본 사람들이 천불을 자기들 절에 모시려 하자 불상들이 "우리는 조선의 사찰에 봉안될 천불이다."라고 하니 돌려보내 줬다고 한다. 막연한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당시 헌정 스님이 경험한 내용을 『일본표해록』에 기록한 내용이니 신비롭기만 하다.
▣ 대흥사와 서산대사
별원지역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크게 활동한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1669년에 건립된 유고 사당 표충사가 있다. 건물 내부에는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표충사의 현판은 정조가 손수 써서 내려준 어필이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리러이 발걸음을 내딛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되리니"
불자가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봤을 정도로 친숙한 이 시구는 요즘 시인이 쓴 현대시 같지만 16세기를 살았던 서산 대사의 해탈송이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봤을 정도로 친숙한 이 시구는 요즘 시인이 쓴 현대시 같지만 실은
16세기를 살았던 서산 대사의 해탈송이다.
대흥사는 서산 대사의 법맥을 이은 고찰이다. 서산 대사는 흔히 제자인 사명당 스님과 함께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명장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불세계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서산 대사가 선교 양종을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구도의 길에 있어서도 자락이 넓고 깊은 선승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당시 수행법은 선과 교로 나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좌선, 진언[1], 염불, 간경[2] 등으로 확산되었다. 승려마다 자기만의 방법을 최고로 쳐서 혼란스러운 시기에 서산 대사의 이 한마디로 불교계의 분란을 잠재웠다. "선은 부처의 마음이며,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 입적을 앞둔 서산대사가 제자들에게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자신의 의발을 전하라고 한 것은 1604년(선조 37) 1월 북한 묘향산 원적암에 행하 마지막 설법에서였다. 서산 대사가 두륜산 대둔사에 가사와 발우를 보관하도록 한 이유는 두륜산 대둔사는 '전쟁을 비롯한 함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라 하여 선조대왕이 하사한 교지와 금란가사, 옥발우, 신발 등을 대흥사에 간직할 것을 사명당에게 유언으로 남겨 현재 성보박물관에 전해진다. 이후 대흥사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서산 대사의 법맥은 4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근세에 이르는 동안 큰 깨달음을 얻은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흥사는 차와 선을 접목시킨 다선일미(茶禪一味) 차의 본향으로 불린다. 알려진 대로 한국 차의 명맥을 잇고 중흥시킨 대종사 초의 선사가 이 절에 주석했기 때문이다. 선사는 경내 일지암에서 차의 역사, 차나무의 품종, 차의 효능, 만드는 법, 생산지와 품질, 우리 차의 역사와 다도의 전통 등에 관한 글을 지었는데, 전체 31 송으로 구성된 『동다송(東茶頌): 동쪽 나라의 차를 칭송하다』이 바로 그것이다. 『동다송』은 지금까지도 한국의 전통 다도를 확립한 저술로 알려져 있다. 초의 선사는 승려 신분을 뛰어넘어 우리나라 차문화와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 호국정신이 살아있는 사찰 대흥사
또한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가면 일제강점기 시절 주조된 태극무늬 범종이 있어 눈길을 끈다. 조국의 광복을 염원한 범종에는 비천(飛天)이 태극기에 꽃과 향공양을 올리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부처님의 가피로 독립을 바라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태극무늬 법종의 울림은 곧 '대한독립 만세'였다. 법종에 태극기를 새겨 넣은 것은 원수를 항복받고자 하는 의미이다. 『증일아함경』에 "악마의 힘과 원수를 항복받고 번뇌를 다하여 남음이 없게 하기 위해 건치(범종)를 치면 스님들은 듣고 모여야 한다"라고 했다. 대흥사에 가면 표충사(表忠祠)와 함께 구국 삼화상의 호국정신을 느낄 수 있다.
대흥사 하면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숙박시설인 유선관이다. 유선관은 1914년 절을 찾는 방문객과 수도승을 위해 지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한민국 최초의 여관으로 아직도 한옥 양식 그대로 영업을 하고 있다. 1990년대 초 대흥사가 관광위락시설 단지를 재정비하면서 사하촌(寺下村)에 있던 상업시설들을 주차장 밖으로 철거했지만 유선관은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과거 90년대 방문했던 시절만 해도 온돌방에서 옛날 방식 그대로 장작을 때우면서 숙박을 하고 불편함 속에서도 정취를 느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천년 숲 한가운데서 스파도 경험할 수 있는 현대식 한옥 호텔 시설로 개보수하였으며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1] 범문을 번역하지 않고 음 그대로 외움
[2] 불경을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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