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선문은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중국 달마의 선법을 이어받아 그 문풍을 지켜온 아홉 산문을 가르킨다. 구산선문사찰의 탄생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신라 불교 사상의 흥망성쇠를 알아야 한다. 661년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마저 점령하기 위해 한창 통일 전쟁을 치르고 있었을 때, 신라의 승려 원효와 의상은 선진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현장 법사가 불교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었고, 당나라 불교계의 새로운 바람은 신라에도 전해져서 신라의 많은 승려들이 당나라에서 불교를 배우기를 간절히 원했다.
▣ 화쟁사상과 천태종의 탄생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불교 유학을 지나던 도중 충청도에서 날이 어두워져서동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이때 원효는 자다가 갈증을 심하게 느껴서 깜깜한 동굴 속에서 주변을 더듬다가 물을 발견했다. 그 물을 아주 달콤하게 마시고 갈증을 풀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지난밤에 자기가 먹은 물은 해골바가지가 있던 더러운 물이었다.
원효는 너무 놀랍고 역겨운 나머지 구역질을 하였고 그 순간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제 달게 마실 때나 오늘 구역질이 날 때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어제와 오늘 달라진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생겨나므로 모든 것이 생긴다." 라고 읊었다고 한다. 그 길로 다시 경주로 돌아가서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책 쓰기에 몰두했다. 그는 일생 동안 150여권의 책을 남겼으며, 그중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유명했으며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특히 「십문화쟁론」은 원효 사상의 핵심인 화쟁사상을 보여주며 불교 종파 간의 대화합에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화쟁사상은 특정한 의견을 고집하지 말고 비판과 분석을 통해 높은 차원의 가치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화합의 사상이다. '부처님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으며 다양한 종파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뜻은 자비 하나다. 그러므로 종파는 통합되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고려 시대 의천은 원효 화쟁사상의 영향을 받아 천태종을 창시했다.
▣ 화엄종의 탄생
의상은 신라의 진골 출신으로 앞길이 창창하게 보장된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중국 화엄종의 대가인 지엄의 밑에서 10년간 화엄학을 공부했으며 의상대사는 중국 화엄종을 계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침략한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자 귀국을 결심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이는 의상대사가 개창한 화엄종이 호국불교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며 전폭적인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으면서 많은 사찰을 세웠다.
원효가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서 많은 조술을 남긴 대저술가였다면, 의상은 오직 화엄학만을 공부했고 이의 포교에 주력하여 「화엄일승법계도」외에는 이렇다 할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신라에 의해 마침내 삼국이 통일되자, 신라 사람들은 신라가 곧 불국토임을 확신하면서 "모든 현상은 하나의 이치로 돌아와야 한다."(만법귀일/萬法歸一)는 화엄종 사상을 통일 왕국의 주도이념으로 삼아 화엄 불국토 건설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 선종(禪宗)의 확산으로 인한 구산선문의 탄생
8세기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신라 왕조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왕실에는 내분이 끊이지 않았고 잦은 왕권다툼 속에서 통일 신라 진골 왕족의 절대적 권위는 빛을 잃어 갔으며 그들의 안정된 통치를 뒷받침하던 화엄사상의 이념적 위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세력과 경제적 기반을 지닌 호족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변화한 신라사회에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게 되었다. 8세기 후반 이래 기존의 사회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신라는 여전히 골품제를 바탕으로 한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제아무리 뛰어나도 신분상 최고집권층이 될 수 없었던 육두품 이하 하층 귀족 출신의 신라 사람들 가운데서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국내의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사람이 많았다. 속인 가운데는 당나라의 과거인 빈공과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었고, 유학승들은 대부분 "문자를 내세우지 않고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깨우친다."(不立文字 直指人心)는 종지를 내건 선종에 크게 매료되었다. 문자(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가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선종의 가르침은 교리와 권위를 중시해 온 종래 귀족불교의 틀을 훨씬 벗어난 혁신적인 새로운 사상이었다.
당나라로부터 이 선종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신행(信行)이었는데, 신행은 북종선을 배워 왔으나 많이 퍼뜨리지는 못했고, 이후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들여온 남종선이 크게 퍼져나갔다. 왕실과 밀착해서 세력을 쥐고 있던 교종의 방해를 받기도 했지만, 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으며 크게 발전해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는데, 크게 9개파가 두드러졌다. 이 9개파의 본산을 구산(九山)이라 한다. 그리고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교종 5개파와 구산을 일컬어 '5교 9산'이라고 한다. 특히 구산의 대도량은 모두 심산유곡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런 풍토를 따라 크고 작은 사찰들이 산간 지역에 창건되었다. 오늘날 산중 사찰에서 많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5교와 중심 사찰
열반종 : 무열왕 때 보덕, 경복사(폐사)
계율종 : 선덕여왕 때 자장, 통도사
법성종 : 문무왕 때 원효, 분황사(폐사)
화엄종 : 문무왕 때 의상, 부석사
법상종 : 경덕왕 때 진표, 금산사
구산선문을 연 스님과 중심 사찰
실상산문 : 홍척, 남원 실상사
가지산문 : 도의, 장흥 보림사
사굴산문 : 범일, 강릉 굴산사(폐사)
동리산문 : 혜철, 곡성 태안사
성주산문 : 무염, 보령 성주사(폐사)
사자산문 : 철감, 영월 흥녕사(법흥사)
희양산문 : 도헌, 문경 봉암사
봉림산문 : 현욱, 창원 봉림사(폐사)
수미산문 : 이엄, 해주 광조사(폐사)
구산선문은 통일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 9세기 초반부터 10세기 초반에 걸쳐 그 지방 호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모두 개산했다. 이 가운데 강릉 굴산사와 보령 성주사, 창원 봉림사, 해주 광조사 등 네 곳은 폐사되어 터만 남았고 나머지 다섯 본산이 현존하고 있다.
남원 실상사, 신라 불교 사상과 구산선문(九山禪門) 사찰 탄생 배경(2)
장흥 보림사, 신라 불교 사상과 구산선문(九山禪門) 사찰 탄생 배경(3)
곡성 태안사, 신라 불교 사상과 구산선문(九山禪門) 사찰 탄생 배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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