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단풍명소로는 여러 곳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소요산이다. 소요산은 수도권에서 지하철로 방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산이며 또한 산세도 완만하여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하여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 중 한 곳이고 또한 한국의 산하 인기 명산 100 산중에서 38위에 올라 있을 정도로 지명도가 높으니 가을에 자재암 방문과 같이 소요산 단풍을 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소요산 단풍은 10월 하순부터 절정에 다다르며 이때 많은 인파가 단풍을 즐기기 위해 산에 온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등산로로 30분 정도만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자그마한 사찰이 있는데그 사찰이 바로 자재암이다. 자재암이 있는 소요산은 경기도 동두천시에 있는 해발 고도 536m의 산이다. 산세가 수려해 경기의 소금강 이라고도 불린다.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과 매월당 김시습이 자주 소요하였다 하여 '소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전국 유명 사찰에 비해 그 규모가 작고 또한 보물이나 유물이 없어서 산의 명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가려져 있는 사찰이다.
자재암 역사와 유래
사찰은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자재암이라 하였고 고려 광중 25년(974)에 왕명을 받아 각규대사가 중창하였으며, 의종 7년(1153)에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대사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중건하였다. 조선 고종 9년(1872)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퇴락한 이 사찰을 44칸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라 개칭하였다.
순종 융희 원년(1907)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군인들이 각처의 의병과 합류하여 독립전쟁이 한창일 때, 의병의 근거지였던 이곳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그 후 2년 뒤에 제암, 성파 양사가 복원하여 원래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그러나 6.25 사변으로 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에 대웅전을, 1971년에는 동ㆍ서승방을, 1974년에는 포교당과 원효대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건립하였다. 그래서 자재암에는 이름난 유물이나 오래된 목조건물을 없다.
원효대사 요석공주
자재암이 있는 소요산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는가?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는 의미다. 마침 문무왕의 딸인 요석공주가 백제와의 싸움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후라 원효대사를 그녀와 맺어 줄 것을 결심하고 그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요석공주 또한 이미 원효대사의 명성을 들어왔던 터라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원효대사가 경주에 있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난다는 것을 미리 조사한 궁리들이 이 사실을 요석공주에게 알리자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궁내로 모시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졸들은 문천교 밑에 숨어 있다가 원효대사가 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길을 막은 후 요석궁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원효대사가 껄껄 웃으며 못 가겠다고 하자 나졸 중의 대효 한 사람이 자신과 무술을 겨루어 대사가 지면 요석궁으로 가고 반대로 이기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 말에 대사는 족히 승낙을 하고 무술을 겨루었는데 출가하기 전 낭도로서 무예가 특출했던 원효대사와 나졸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요석궁으로 꼭 모시고 오라는 지엄한 명을 받은 나졸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원효대사에게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 가지였다. 나졸들이 덤비는 대로 원효대사는 가볍게 들어 문천교 밑으로 떨어뜨리니 다리 밑에는 허우적거리는 나졸들이 점점 늘게 되었다. 마지막 나졸 한 명과 함께 원효대사가 문천교 밑으로 일부러 빠지니 나졸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모르고 자연스럽게 요석궁으로 모시고 갈 수 있었다.
젖은 옷을 말려드린다는 구실을 삼아 요석궁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이때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게 된 것이다. 그 후부터 원효대사는 파계하였다고 승복을 벗고 자칭 '소성거사'라 하고 다니다 우연히 광대들이 돌리는 큰 박을 보고 도구를 만들어 무애라 이름 짓고, 촌락으로 다니며 많은 사람들 교화하기 시작하여 후일 삼국통일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원효폭포와 원효샘
자재암을 향해 등산로 입구에서 800m 정도를 걸어 오르면 소요산의 명소, '원효폭포'를 만난다. 절벽 사이로 약 10m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떨어진다. 소형 폭포지만 폭포 옆에 작은 굴이 나 있어 그 분위기가 제법 그윽하다. 자연 석굴의 명칭 역시 원효굴로 좌선수행하기 딱 좋은 자리다. 지난 긴 세월 동안 굴에 들어앉아 좌선한 이가 수없이 많으리라. 현재 굴 안에는 석가모니 삼존불과 좌우로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원효폭포에서 등산로 쪽을 향하면 108 계단이 있고, 계단을 오르면 원효대사가 좌정했다는 바위인 원효대가 등장한다. 다시 원효대에서 5분쯤 산길을 따라 걸으면 자재암이다.
자재암 경내는 고요하고 평화롭다. 비록 작은 터에 자리 잡은 사찰이지만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의 평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터인 것 같다. 사찰 옆으로 우뚝 솟은 바위와 그 밑에 있는 동굴 법당은 이 작은 사찰에 신비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다. 외벽을 새로 쌓아 인공석굴처럼 보이지만 실은 천연 동굴로 이 굴 역시 원효대사의 수행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나한전으로 십육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내부도 벽과 바닥을 판판하게 마감해 매끈하다. 나한전 입구에는 물이 퐁퐁 솟는 작은 샘이 있다. 그 이름 또한 원효샘이다. 원효대사가 머물 때부터 이 자리에서 석간수가 솟았고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인 이규보는 원효 샘의 물맛을 보고는 '젖처럼 맛있고 차가운 물'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자재암은 대웅전이 가장 큰 법당이고 이 법당 앞에는 시원한 소요산 청량폭포가 떨어져 내려 사찰의 운치를 더해주고 신선이 거주하는 세계가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이 들고, 이곳에서 원효스님이 도를 닦기 위해서 머물렀다. 원효스님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은 이후 더욱 도를 깨우치기 위해 자재암에서 정진했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뜻대로 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자재암(自在庵)이라 했다.
비록 오래된 유물이나 거대한 목조건축물은 없어도 원효대사가 일체유심조 도리를 깨우치기 위해 수련한 고요한 자재암 가을이 오면 천연의 물감으로 물든 소요산의 단풍도 볼 겸 항상 가고픈 생각이 드는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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