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는 5월에 하루 정도 가족 여행하기에 아름다운 사찰이다. 신륵사에 가기 전에 먼저 세종대왕릉을 방문하고 이어지는 코스로 능침사인 여주 신륵사를 방문하는 것도 좋다. 세종대왕의 능이 지금의 자리로 이장된 후 조선의 국운이 100년이나 연장되었다면서 '영릉가백년'이란 말이 생겨났다. 또한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릉은 세종이 묻힌 곳인데, 용이 몸을 돌려 자룡으로 입수하고, 신방에서 물을 얻어 진방으로 빠지니 모든 능 중에서 으뜸이다'칭할 정도다. 그러니 명당에서 기운을 받고 신륵사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몰락해 가던 신륵사가 지금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세종대왕릉의 능침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 혜근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으나 사세가 쇠락하다가 1469년(예종 1) 영릉의 원찰이 되면서 절이 확장되고 이듬해 세조 비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세종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을 담았다. 사찰이 유생들의 유흥장이 되고 승려가 천민 취급받던 시대에 원찰로 정해진다는 것은 행운이다. 성종 이후 성리학이 득세하자 왕릉의 원찰 제도가 없어지는 풍토가 되어 신륵사는 옛 이름을 되찾았다.
신륵사 명칭과 관련해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므로 말이 순해졌다. 신력으로 제압했다고 하여 절의 이름을 신륵사라 했다'라고 한다. 이 전설에서 용마는 강의 범람을, 인당대사가 신력으로 제압했다는 것은 사찰을 세우고 강의 수해를 억눌렀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불력(佛力)으로 재해를 극복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기원을 신륵사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신륵사가 유명해진 이유는 나옹화상이 입적하면서 유명한 사찰이 되었다. 나옹화상은 고려 말의 유명한 고승으로 ,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하며, 이를 우려한 고려의 권세가들은 그를 밀양 영원사로 귀양 보냈으며, 나옹은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옹화상의 영정은 조사당에서 볼 수 있으며 불당 중앙에는 지공화상이, 그 좌우에는 무학대사와 나옹화상의 영정이 있다.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 점의 진영 가운데 삼화상을 그린 진영은 매우 드물어 희귀한 자료이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4년(1678)에 지어진 후 정조 21년(1797)에 수리되기 시작해서 정조 24년에 완공되었다. 내부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있다. 또한 영조 49년(1773)에 제작한 범종과 후불탱화가 있다. 극락보전의 정문 위에는 나옹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 오는 '천추만세'라고 적힌 현판이 있는데, 입체감 있게 쓰여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수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신륵사에는 보물 2ㅔ226호인 7층의 다층전탑이 강가 아담한 동산 위에 세워져 있는데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 시대 전탑이다. 전탑이란 벽돌을 구워 탑을 쌓은 것으로 주로 중국의 탑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신륵사는 벽절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보물은 아니지만 신륵사 하면 남한강을 배경으로 한 정자(강원헌, 江月軒)가 떠오르며, 여주 팔경의 첫 번째는 신륵사라고 한다. 예로부터 신륵사가 자리한 경기도 여주는 조선시대 4대 나루(광나루, 마포, 조포, 이포) 중 조포와 이포, 이렇게 두 개를 가지고 있을 만큼 사람과 물자가 수시로 드나들던 수운 요지였으며, 강월헌 아래가 바로 조포가 있던 곳이다. 영월과 정선에서 뗏목을 만들어 서울로 가던 뗏꾼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물살을 가르고 오다가 강월헌의 석탑을 보면 '이제 살았구나'라고 안심을 하기도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문인 김병익의 『신륵사중수기(1874)』에 신륵사에 대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글이 전해진다.
'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 될 수 없거니와 유학자로서도 이를 위하여 노력할 일은 아니지만,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여주는 산수가 청수하고 그윽하며 또한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이와 더불어 신륵사는 높고 서늘한 것이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 한 지경과 같다. 오직 이 두 가지 이유로 온 나라에서 일컬어 온 지가 이미 천년이나 되었으니 비록 내가 절을 세우지 못할 망정 폐할 수 있겠는가?
비록 지금은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조포의 아름다운 금빛 모래를 볼 수 없지만, 노을이 지는 정자에 앉아 멋진 남한강 은빛 물결의 출렁이는 풍경을 눈에 담아 간다면 아마 마음속의 국보로 기억될 것이다.
사도세자와 정조를 지키는 융건릉 능침사는 용주사는 다음 편에...
조선시대 왕릉과 수호사찰 능침사(陵寢寺)(1)
화성 용주사, 조선시대 왕릉과 수호사찰 능침사(陵寢寺)(3)
남양주 봉선사, 조선시대 왕릉과 수호사찰 능침사(陵寢寺)(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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