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힐링 사찰 여행

자재암과 부석사, 신라시대 유학파와 국내파가 창건한 사찰(1)

by 3000포석정 2023. 2. 21.
반응형

문화광광부가 2000년 10월 파악하 우리나라의 전통 사찰 등록수는 약 868개 정도 되는 것 같다. 사찰 대부분의 창건 이야기를 보면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이야기가 자주 나오며 또한 신라시대에는 어떤 연유로 사찰을 많이 지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원효대사는 신라시대의 승려이자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며, 유명한 이야기인 해골 물 사자성어와 관련된 인물이다. 원효대사는 34세가 되던 때에 8살 아래인 의상과 함께 선진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당항성에 이르러 날이 저물게 되어, 어느 무덤 앞에서 잠을 자다 한밤중에 목이 너무 말라 물을 찾고 있었다. 찾다 보니 발로 옆에 바가기자 있는 물을 아주 맛있게 먹고 다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일어나보니 간밤에 마신 물을 해골에 고인물이었다. 원효대사는 너무 놀라웠고, 역겨운 나머지 구역질까지 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一切唯心造)"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그 길로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다.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 하여 더 이상 입당 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곧바로 되돌아와 이후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했으며

일반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 생활화 시켰다.

 

의상대사는 원효와 달리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화엄종의 교리를 배워 왔으며, 귀국 직후 낙산사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는 것을 비롯해 많은 사찰을 세우고 각처에서 교화 활동을 폈다. 원효가 저술에 힘쓰고 개인적인 교화 활동을 편 데 반해, 의상은 교단 조직에 의한 교화와 제자들의 교육을 중시한 활동을 많이 했다.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파, 의상은 예정대로 유학을 다녀온 해외파다.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신라 왕조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사회통합의 이념이다. 백제 고구려의 반발을 수용하며 신라 중심의 이념으로 사회를 통합하는게 목표였을 것이다. 그 이념적 바탕의 하나로 작용했던 것이 의상의 화엄사상[1]이며, 이런 통합 이념을 멀리 전파시키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절이 건립되었고 그러다 보니 의상의 이름이 많이 들어갔다. 전국에 의상이 만든 절이 1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의상이 당의 선진적인 화엄종을 익혀 그것을 신라의 풍토에 맞게 설파 하였다면, 원효는 반대로 독자적인 깨달음을 통해 당시 신라인의 마음을 치유해 주고 폭넓은 조화의 길을 터놓았다. 어떻게 보면 의상대사는 국가 종교로서 통치 불교를 지향했다면, 의상대사는 민중들의 삶을 돌봐 주는 실천적인 구도자로서 불교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원효와 의상과 관련된 설화를 보게 되면, 원효는 항상 여인의 유혹 또는 미색에 흔들리는 이야기가 많고, 의상은 올곧은 고승의 이야기로 전해져 온다. 낙산사 홍련암에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낙산사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중국 당나라의 지엄 문하에서 화엄교학을 공부한 의상대사가 신라로 돌아온 해는 문무왕 10년(670)이었다. 귀국 후 의상대사는 낙산의 관음굴을 찾았다. 의상대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고, 그는 진심으로 7일 동안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 이후 원효(元曉)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 절을 찾았는데, 원효가 절에 이르기 전에 여인으로 변한 관음이 빨래를 하는 물을 마시라고 건네자 이를 더럽다고 엎질러 버렸다. 그러자 파랑새 한 마리가 "제호(일종의 감로수)를 거절한 승려여!" 하고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원효가 관음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낙산사에 가서도 풍랑이 심해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범어사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영정,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또 다른 설화를 보면 의상은 유학을 마치고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등주 항구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는 평소 독실한 신도로서 의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의상이 불법을 공부하여 득도하고 무사히 귀국하도록 부처님에게 빌었으며 자신이 용이 되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면서 황해 바다에 몸을 던졌다. 하늘이 이에 감읍하여 선묘는 용이 될 수 있었고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면서 신라까지 무사히 보살폈다고 한다. 한편 원효대사는 소요산에 있는 열심히 불법을 닦고 있는데 한 밤중에 나타난 여인의 유혹에 흔들리면서 갈등하는 모습과 결국은 극복했지만 아직 공부가 부족한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전해져 온다. 어떻게 보면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서 추측해 보건데 신라시대 당시에는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최신 불교 이론을 바탕으로 통치 불교를 펼쳐 오고 백성들의 신앙인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의상대사를 왕실과 지배층에서 더 높이고, 국가 통치 이념에 적합하지 않는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한 원효대사를 관세음보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격이 낮은 승려로 보이기 위한 당시의 지배층의 사상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소요산 자재암과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주 부석사 사찰 기행은 다음 편에.....



[1]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임

 

2023.02.21 - [힐링 사찰 여행] - 신라시대 유학파와 국내파가 창건한 사찰(2)(소요산 자재암)

 

신라시대 유학파와 국내파가 창건한 사찰(2)(소요산 자재암)

서울, 경기 단풍명소로는 여러 곳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소요산이다. 소요산은 수도권에서 지하철로 방문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산이며 또한 산세도 완만하여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2002년

temples.tistory.com

2023.02.21 - [힐링 사찰 여행] - 신라시대 유학파와 국내파가 창건한 사찰(3)(영주 부석사)

 

신라시대 유학파와 국내파가 창건한 사찰(3)(영주 부석사)

부석사가 소재해 있는 영주시는 ‘소수서원’, ‘부석사’과 함께 두 개나 되는 세계문화유산을유산을 보유한 고장이다. 부석사 경내와 부속 건물에 있는 각종 건축물과 석탑은 보통 국보 아니

temples.tistory.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