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침은 제왕이 묻힌 능(陵)과 추모하는 장소인 침(寢)을 합친 말이다. 능원(陵園)에 침을 조성하는 능침 제도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릉에는 능의 제사와 능역 보호를 담당한 사찰이 설치되었다. 조선의 500년 역사와 함께 지속된 사찰은 재궁(齋宮)[1], 능침사(陵寢寺), 조포사(造泡寺)[2]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렸으며 그 명칭에 따라 담당하는 역할도 조금씩 변모하였다. 능침사는 사찰 내에 왕이나 왕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정기적으로 능 주인의 제사를 담당한 독립된 사찰을 의미했다.
조선왕조의 개창자 태조 이성계(李成戒, 1335~1408)의 능은 건원릉이다. 건원릉은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해 있으며, 산릉 조성이 끝난 후 태종은 능역 안에 불교식 재궁을 설치하고 개경사(開慶寺)라는 사찰을 지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태종은 유교사상에 입각한 조선을 만들고자 불교식 의례를 취하지 않아 자신이 묻힐 헌릉에는 절을 세우지 말라고 명하였지만, 부모의 능에는 모두 능침사를 설치하였다. 헌릉은 조선시대에 들어 능침사를 설치하지 않는 첫 사례에 해당한다. 원래 세종은 원경왕후의 능 주변에 절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상왕 태종이 "산릉은 백세 후에 내가 갈 땅이라, 지금 비록 깨끗한 중을 불러 모은다 하더라도, 훗날까지 늘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더러운 중의 무리가 내 곁에 가깝게 있게 된다면, 내 마음이 편하겠는냐."며 절을 짓지 말라고 명해서 이 때문에 헌릉에는 사찰이 건립되지 않았고, 능역 안에 불교식 재궁이 들어서는 전통은 중단되었다.
세종은 빼어난 효자이자 모범생, 영재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반항아가 아니며,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부왕의 배불 정책을 이어 더한층 불교 억압에 몰두한다. 태종 때 혁파한 사찰과 노비 중에서 완전히 처리되지 못한 나머지를 모두 처리했다. 연례행사인 도성 내의 경행(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불경을 외우는 의식)을 폐지시켰다. 성 밖 승려는 성내 출입을 금하고 동진출가(어려서 출가함)을 엄금했다. 세종 5년(1424) 월에는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을 합쳐서 선종(禪宗)으로,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 합쳐서 교종(敎宗)으로 만들었다. 남았던 7종을 무작위로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로 축소한 것이다. 전국에 36개의 사찰만 남겨 선종 18사에 스님 수 도합 1,970명, 교종 18사에 스님 수 1,800명으로 제한했다. 태종에 의해 전국 사찰이 242개사로 축소되었는데, 세종 때는 사정없이 줄여서 36개사만 남는다.
『조선왕조실록』은 불교에 대해서 참으로 인색하고 용렬하기까지 한다. 척불의 기록은 세세한 것까지 놓치지 않았지만, 불교의 기여는 1단짜리 기사로 취급하거나 외면한다. 국시, 왕의 의지가 절대적이던 시대의 유물이다. 불교 탄압의 절정은 아이러니하게 성군 세종 때다. 석가모니를 석 씨, 부처를 불씨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혁명가이도 하다. 무혈 문자 혁명을 달성한 세종은 생애 후반기에는 불교에 귀의한다. 숭유억불의 국시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불사를 자주 행하고 경전 읽기를 즐겼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헌릉 아버지 옆에 무덤을 조성하여 안장되었으나, 이후 문종, 의경세자, 단종, 인성대군이 연달아 요절하자, 세조대에 영릉의 천릉(遷陵) 논의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논의가 진행되던 중에 세조가 사망하면서, 영릉 이장은 예종대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여주에 영릉을 이장하였다. 영릉을 여주로 천장하고 보은사를 지을 계획이었으나, 능역 주변에는 절을 세울 땅이 없었다. 대신 근처에 신륵사라 불리는 절이 옛 현인이 유람한 자취가 완연하고 또 선왕의 능역과도 가까워 새 절을 세우는 대신 신륵사를 중창해 능침사로 삼게 되었다. 이렇듯 살아서는 불교를 가장 많이 억압하고 핍박하였던 세종이었지만 생애 후반기에는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사후에는 후손들에 의해 그토록 핍박했던 스님들에게 명복을 기원받는 왕이 되었다.
조선시대 능침사는 내세를 기원하는 불교 시설인 동시에 유교의 효를 실천하는 공간이었다. 유교사상으로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고자 했던 태종이 본인의 능에는 절을 세우지 말라고 하였지만, 부모를 위해서는 능 옆에 절을 세웠으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 옆에 조포사를 마련하고 위패를 봉안한 것 역시 '효'를 실천한다는 명분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능침사를 볼 수 있는 사찰로는 광릉의 봉선사, 선정릉의 봉은사, 융건릉의 용주사, 여주 신륵사 등이 있어 효심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는 흔히 숭유억불 시대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왕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왕릉에는 500여 년간 왕릉의 제사를 돕고 왕릉을 보호, 관리하는 사찰들이 설치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능침사로 조선 후기에는 조포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조금씩 역할이 변모해 가기는 했지만 왕릉을 지킨 사찰이 있었기에 지금 후손들이 볼 수 있다.
[1]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
[2] 예전에 능이나 원에 딸려 나라의 제사에 쓰이는 두부를 맡아서 만드는 절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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