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용연사 역사와 유래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는 천년 역사와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유서 깊은 천년고찰(千年古刹)로서 신라 신덕왕 1년(912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했으며, 이 절터는 용(龍)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서 절 이름을 용연사(龍淵寺)라 불린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선조 36)에 휴정 사명대사(四溟大師)의 명령으로 인잠(印岑)ㆍ탄옥(坦玉)ㆍ 경천(敬天) 등이 재건했다. 1650년(효종 1)에 일어난 화재로 보광루만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으나 다음해에 계환(戒環)ㆍ여휘(麗輝) 등이 중건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ㆍ영산전ㆍ명부전ㆍ삼성각ㆍ안양루ㆍ사명당ㆍ선열당ㆍ심검당ㆍ유정당 등이 있다.
용연사의 전설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에 "용연지"라는 못이 있었다. 이 못은 주변마을 사람들의 식수와 농업용수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가뭄이 들어도 주민들은 이 못에서 부족한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매월 정월 초에는 제사를 올려 그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평온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던 중 이 마을에 큰 재앙이 닥치게 되었는데, 그 것은 바로 외적의 침입이었다.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맞서 싸웠다. 그러나 외적을 막아내려니 전방에 나가 외적과 직접 맞서 싸울 주민들이 필요했으나 대부분의 주민들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라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외적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 마을이 위험에 처하자 마침내 일곱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발 벗고 나섰다. 이 청년들의 목숨을 건 전투 덕분에 외적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청년들은 모두 전사하여 못의 물을 피로 붉게 물들게 하여 마을 주민들을 비통하게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청년들이 죽은 지 몇 년이 지나자 그 못의 물이 이유 없이 계속 마르기 시작했고, 결국은 바닥이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못은 마을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물을 공급해 왔기 때문에 그 일은 심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은 일곱 명의 청년들이 한이 남아 이 못을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영령을 기리는 제사를 매년 크게 치러주었다. 그랬더니 그 이후로는 신비롭게도 못의 물이 다시 불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언제부터인가 그 못에서 일곱 마리의 어린용이 살기 시작했고, 특이하게도 이 마을에 가뭄, 홍수, 화재, 기한 등 인간 능력 밖의 재앙이 생겨 힘들 때마다 이 용들이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에게 이 못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천 년이 지나자 용이 승천할 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이 일곱 마리의 용들이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는 일이 발생하여 못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그 싸움 중에 네 마리의 용은 무사히 승천을 했지만 세 마리는 끝내 올라가지 못하고 그 못에 남아 계속 다투게 되었다. 마을의 우환을 관장하던 용들이 승천을 위한 싸움에 몰두하느라 마을을 돌보는 일을 소홀 하게 되어 그해 농사는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고, 마을에는 전염병이 돌아 목숨을 잃는 주민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먼 바다로 나가 재앙으로부터 마을을 구해달라고 용왕님께 제를 올리게 되었다. 용왕은 그의 아들인 이무기를 지상에 내려 보내 세 마리의 남은용을 모두 죽이도록 명령했다. 결국 세 마리의 용은 못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 후 마을 주민들이 죽은 용을 위해 제사를 올려주었다. 이런 용을 위한 제의 풍습은 매년 이루어지면서 전승이 되어 왔고, 주민들은 죽은 용들을 위해 절을 지었는데, 이 절을 용의 못이라는 의미에서 용 용(龍 )자에 못 연(淵)자를 써서 용연사(龍淵寺)라 불렀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지금도 용연사에서는 매년 단오(음, 5월5일)경에 용왕제를 성대히 거행하고 있다.
용연사 문화유산
종목 | 명칭 | 시대명 |
보물 |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 | 조선시대 |
보물 |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 조선시대 |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
계단(戒壇)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이 곳에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하여 진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임진왜란(1592)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의 부처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길 때 용연사의 승려들이 그 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한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신은 별다른 꾸밈을 하지 않은 채 꼭대기에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두었다. 절 안에 세워져 있는 석가여래비에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고 이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계단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구조가 섬세하고 조각기법이 예리하며, 특히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당시의 석조건축과 조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계단(戒壇) : 계(戒)를 주는 의식이 이루어지는 단(壇). 대체로 흙과 돌로 쌓아서 만들며 대승(大乘) 계단, 소승(小乘) 계단의 두 가지가 있다.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大邱龍淵寺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및 腹藏遺物)'은 복장 후령통을 비롯하여 조성발원문, 복장전적 등 조성 당시의 원형을 갖추고 있어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1655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시기, 봉안사찰, 조성주체, 제작자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에 17세기 불상연구의 기준작이 된다. 또한 1762년의 중수개금기(重修改金記)까지 포함하고 있어 불상의 중수개금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불상에 보이는 귀염성이 느껴지는 얼굴, 당당하고 장대한 신체비례, 변화가 거의 없는 강직한 선묘, 무릎 앞에 넓은 주걱모양의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로 밀도 높게 새긴 세밀한 주름 등은 조각승 도우(道祐)의 양식적 특징으로 파악된다. 도우는 17세기 중엽경의 대표적인 조각승으로 무염(無染)의 조각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얼굴모습이나 옷 주름의 표현 등에서 자신만의 특징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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