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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울진(천축산) 불영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33)

by 3000포석정 20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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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불영사 역사와 유래

불영사(佛影寺)가 자리한 불영사 계곡은 명승 제6호로 지정된 15㎞에 이르는 길고도 장엄한 계곡이다. 예전에는 워낙 교통이 불편하여 찾는 이가 많지 않았으나 1985년 불영사 계곡을 끼고 달리는 36번 국도가 포장되면서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불영사 계곡은 성류굴의 맞은편이 되는 수산리로부터 노음리 천전동 건작, 밭치밭, 하원리 등으로 이어진다. 주변에는 광대코 바위, 주절이 바위, 창옥벽, 명경대, 의상대, 산태극, 수태극 등 각종 이름이 붙은 명소가 30여 개소에 이른다.

 

불영사는 651년(신라 진덕왕 5) 의상 대사(625-702)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의상 대사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해안을 따라 단하동(丹霞洞)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서역의 천축산을 옮겨온 듯한 지세가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맑은 물위에 부처님 다섯 분의 형상이 떠올라 인연 깊은 곳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부근 폭포에 독룡(毒龍)이 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사는 처음 독룡에게 설법하고 이 땅을 보시할 것을 청했으나 용이 따르지 않자 법력으로 쫓아내었다. 용은 분하여 산을 뚫고 돌을 부수며 떠났는데 대사가 못을 메워 사찰을 창건하였다.

 

의상 대사는 이어서 남쪽에 청련전(靑蓮殿)을 짓고 무영탑(無影塔)을 세워 비보(裨補)한 뒤 산 이름을 천축산, 절 이름을 불영사라 하였다. 처음 연못에 비친 부처님 모습의 바위는 불영암(佛影巖), 용이 산을 뚫었다는 자리는 용혈(龍穴), 용이 도사리고 있던 곳을 오룡소(五龍沼)라고 하며, 불영사를 휘감아 도는 광천(光川) 계곡은 구룡(九龍) 계곡으로도 불린다. 지금 사찰 경내에 있는 연못이 바로 의상 대사가 부처님 그림자를 보았다는 불영지(佛影池)이다.

 

그런데 불영사를 창건한 의상 대사는 그 뒤 오랫동안 천하를 두루 다니다가 오랜만에 다시 불영사로 돌아왔다. 그때 절 입구의 선사촌(仙海村)에 이르러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몹시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부처님이 드디어 돌아오셨군요!"하였다. 마을 사람들도 이를 보았는데, 그 이후로 불영사를 불귀사(佛歸寺)로 부르게 되었다.

 

의상 대사는 불영사를 창건하고 9년 동안 머물렀고 원효 대사도 왕래하였다. 그리고 당시 불귀사, 곧 불영사 주변에는 동쪽으로 삼각봉(三角峰), 절 아래로 좌망대(坐忘臺)․오룡대(五龍臺), 남쪽으로 향로봉(香爐峰)․청라봉(靑螺峰)․종암봉(鍾巖峰), 서쪽으로 부용성(芙蓉城)․학소대(鶴巢臺), 북쪽으로 금탑봉(金塔峰)․의상대(義湘臺)․원효굴(元曉窟)․용혈(龍穴) 등이 있어 모두 절의 승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창건에 대한 이러한 내용은 1370년(고려 공민왕 19) 유백유(柳伯儒)가 지은 「천축산불영사기」에 나와 있다. 이 「천축산불영산기」는 불영사에 대한 최초의 기문으로, 이후 많은 중수 현판들이 모두 이 기문을 인용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지금 그 원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종이에 묵서하여 기록한 듯하다. 이 기문은 「불영사중창기」에 따르면 1611년 무렵까지만 해도 절에 보관되었던 것을 알 수 있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불영사 문화유산

종목 명칭 시대명
보물 울진 불영사 응진전 조선시대
보물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 조선시대
보물 불영사 영산회상도 조선시대
보물 울진 불영사 불연 조선시대
명승 울진 불영사계곡 일원  

<불영사 응진전(좌)과 대웅보전(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응진전

불영사는신라 진덕여왕 5년(651) 의상이 세웠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 연못 위에 다섯 부처님의 영상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거기 살던 용을 쫓아낸 뒤 절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조선 태조 5년(1396) 나한전만 남긴 채 화재로 모두 불에 타 버렸고 임진왜란 때에도 영산전만 남기고 모두 불 타 버렸던 것을 훗날 다시 짓고 많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ㆍ가섭과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1984년 수리 공사 때 발견한 기록으로 임진왜란 전ㆍ후에 여러번 고쳐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원래는 영산전이었다고 한다. 건물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기 위해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에 남아 있는 단청은 안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조선 중기의 문양을 살펴볼 수 있다.

 

▶대웅보전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651)에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전하는 절이다. 대웅보전은 절에서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중심 법당을 가리키며 지금 있는 건물은 안에 있는 탱화의 기록으로 영조 11년(1735)에 세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씩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각 공포의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건물에 색을 칠한 단청 부분을 들 수 있는데 바깥쪽은 다시 칠하여 원래 모습을 잃었지만 안쪽은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천장부분을 비롯한 벽, 건물을 지탱하는 굵직한 재료들에 그림을 그린 기법들은 수준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건축양식과 기법연구, 격조 높은 불교그림과 단청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조선 후기 건축물이다.

 

 

<불영사 영산회상도(좌), 불연(가운데), 불영사 계곡 일원(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산회상도

영산회상도는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대개 불상의 뒷벽에 위치한다. 이 영산회상도의 석가여래는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우견편단의 옷을 걸쳤으며,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앉아 있다.

 

석가여래 주변으로 10대 보살, 사천왕상, 상단의 10대 제자 등이 배열되어 있다. 주로 영산회상도에서는 8대보살이 그려지는데, 이 그림에서는 10대보살을 표현한 점과 석가불 아래의 그 보살이 유난히 큰 점이 특징이다. 석가의 옷이 붉은색이고 석가 뒤의 광배가 이중으로 붉은 테를 두른 점등은 조선 후기의 불화양식보다 약간 앞선 양식적 특징이다. 채색의 사용법이 유창하고 아름다우며 묘사법이 정밀하여 그림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조선 영조 9년(1733)에 그려진 이 그림은 격조있는 양식, 양호한 보존상태 등으로 18세기 초 조선불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불연

'울진 불영사 불연'은 1670년(현존 11) 화원(畵員)으로 추정되는 광현(廣玄), 성열(性悅), 덕진(德眞) 등이 참여해 조성한 2기의 불교의례용 가마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약 20기의 조선 후기 불연(佛輦) 중 형태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작품이다.

 

불연은 불가(佛家)의 불보살, 사리, 경전, 불패, 영가 등 예배의 대상을 의식도량으로 모셔오는 시련의식(侍輦儀式)에서 쓰이는 매우 중요한 의식법구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불연 유물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것이며, 그 중에서도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은 매우 드문 형편이다. 이러한 점에서 '울진 불영사 불연'은 2기 모두 1670년이라는 분명한 제작시기와 화주(化主) 학종(學宗)이 좋은 장인을 만나 불연을 제작하게 되는 동기와 배경, 그리고 제작에 동참한 시주자, 불연의 제작자로 추정되는 스님 등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교목공예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 후기 불연 중 제작 당시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면서 제작배경을 소상히 담은 기록이 남아 있고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사례로는 단연 불영사 불연이 대표적이다.

 

▶불영사 계곡 일원

울진군 근남면에서 금강송면 불영사에 이르는 곳으로, 계곡을 따라 그림같은 자연 경치를 볼 수 있다. 여러가지 모양의 바위와 낭떠러지가 많아서 특별한 이름이 붙은 것만도 30개에 이른다. 불영사는 구룡폭포 근처 금강소나무 숲 속에 있는데, 신라 진덕여왕 5년(651)에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는 보물 웅진전 등 문화유산과 함께, 보기드문 꼬리진달래, 백리향을 비롯, 560 종류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조류11종, 어류 42종, 포유류 17종, 나비 30종, 거미류 94종 등이 서식하는 생태의 보고이기도 하다.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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