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인사 역사와 유래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에있는 사찰이며, 순천시의 송광사, 양산시의 통도사와 함께 한국의 3보 사찰로 꼽힌다. 3보란 불교에서 불(佛), 법(法), 승(僧)을 뜻하는데, 해인사는 법보(팔만대장경), 통도사는 불보(진신사리), 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 사찰이기 때문이다. 더하여 부산광역시의 범어사, 구례군의 화엄사 등과 함께 5대 사찰로 꼽히기도 한다.
신라 애장왕 3년(802년) 창건되었다. 소성왕의 어머니 성목태후와 애장왕은 해인사에 2500결이나 시납을 했다. 이렇듯 해인사에 신라 왕실이 적극 후원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착하게 살던 노인이 떠돌이 강아지를 데려다가 정성껏 키웠는데, 사실 그 강아지는 용왕의 딸로 잘못을 저질러서 강아지가 되어 속죄하던 중이었다. 속죄를 마친 용왕의 딸은 용궁으로 돌아가 자신을 보살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용왕에게서 도장을 노인에게 주었다. 그 도장은 원하는 것을 쓰고 도장을 찍으면 적은 것이 실현되는 도장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도장을 쓰지 않고, 오히려 도장을 사용해 절을 세우는 비용을 댔다고 한다. 그래서 바다 해(海)와 도장 인(印)을 써서 해인사가 되었다고 한다.
세월에 따라화재로 인해 총 7차례 중수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마지막 중수를 마쳤다. 신기하게도 화재 때마다 장경판전은 화마를 피해 갔다. 화재가 하도 많이 일어나다 보니까 화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해마다 단오날이 오면 해인사 남쪽에 있는 매화산 남산제일봉 정상 및 절 경내 다섯 곳에 소금을 단지에 담아 묻는 행사를 한다. 남산제일봉이 화기의 형상이라 여기서 화기가 날아들어 해인사에 불이 자주 나기 때문에 바닷물로 불길을 잡겠다는 의미이다.
6.25 전쟁 때 빨치산들이 기지로 삼기에 좋다는 이유로 미군에 의해 폭격대상으로 지정되었으나, 김영환 장군(1921~1954)을 비롯한 파일럿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상부를 설득하여 가까스로 폭격을 피했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해인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 따라서 2002년 이후로 해인사에서는 김영환 장군을 기리는 추모제를 매년 연다.
팔만대장경 역사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인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한번 만들었던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고 해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부른다.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데, 인간의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도 말한다.
불교 문헌에서 '8만 4천'은 매우 많다는 뜻으로 쓰이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가령 인도의 아소카 대왕이 인도 곳곳에 84,000개의 불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부처들이 설한 온갖 법문들을 모두 가리켜 '8만 4천 법문'이라고도 표현한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이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 함은 부처의 모든 가르침을 모았다는 자신감에 찬 표현이다.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동기는 11세기에 거란군의 침입을 막고자 고려 현종 대부터 선종 대까지 약 80년에 걸쳐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에서 시작했다. 초조대장경은 대반야경 600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000여 권을 포함했다. 초조대장경은 원래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부인사와 대구 그리고 팔공산으로 옮겼다. 이후 초조대장경은 1232년(고종 19년) 몽골군이 침략하면서 소실되었고,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南禅寺)에 일부분인 1715권 인경본만이 전한다.
이외에도 국내 수집가나 국가기관에서 인출본을 역수입하여 현재는 국내에도 초조대장경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으며,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었다. 초조대장경을 조판한 후 거란군이 물러갔듯이 불력(佛力)으로써 몽골군을 쫓아내기 위해 경판들을 본래 강화성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보관했다가 이후 선원사로 옮겼다.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398년(태조 7년) 5월 합천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에 이른다.
팔만대장경은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대장경이라는 단어는 "석가모니가 일생 동안 설법한 경전과 계율 및 그 내용들에 대해 후대의 사람들이 첨부한 논서, 주석서, 이론서들을 집대성한 불교경전의 총서(叢書)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대장경판은 종이에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이므로, 말하자면 국립도서관 불교 섹션을 인쇄판형과 종이 인쇄본 통째로 넣어놨다고 보면 된다. 정식 명칭은 '해인사 대장경판' 또는 '재조대장경'이지만, 보통 '팔만대장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팔만대장경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국가에서 경전 정리 사업으로 진행해 국가별로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데, 한반도의 판본은 고려시대에 시작하여 조선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여러 번 인쇄되었다.
대표적으로 해인사의 수다라장 다락방과 강원도 평창군의 오대산 월정사 및 부산의 동아대학교에는 해인사 대장경판을 인경하여 만들어진 대장경 판본 책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조선 전기 일본의 요청으로 보내준 판본도 꽤 많이 남아있다. 현재까지 대장경판과 인쇄본이 모두 남아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 고려판 팔만대장경이다.
해인사 문화유산(국보편)
종목 | 명칭 | 시대명 |
국보 |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고려시대 |
국보 |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 조선시대 |
국보 |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 고려시대 |
국보 |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 고려시대 |
국보 |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 통일신라 |
국보 |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 통일신라 |
▶해인사 대장경판
대장경은 경(經)ㆍ율(律)ㆍ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ㆍ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해인사 장경판전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ㆍ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ㆍ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해인사 고려목판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경전, 고승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이 목판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새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과는 달리, 지방관청이나 절에서 새긴 것이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ㆍ서 사간판전(寺刊板殿)에 보관되어 있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지방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판각하였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이 목판에는 『금강경』,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과 신라ㆍ고려ㆍ중국의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 있는데, 경전류는 대부분 간행기록이 있어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유통 등 불교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다.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은 비록 간행기록이 없고 전권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으나,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희귀한 자료들이다. 고려시대 판화 및 판각기술은 물론이고, 한국 불교사상 및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국보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은 신라 말~고려 초에 활동한 승려인 희랑대사(希朗大師, 10세기)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초상조각[祖師像;僧像]으로서, 고려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사한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승(高僧)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상을 많이 제작했으나, 우리나라에는 유례가 거의 전하지 않으며 이 작품이 실제 생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품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은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乾漆)로,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 만든 당시 제작기술이 잘 남아 있고 뛰어난 조형성을 지닌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아 왔다. 건칠기법이 적용된 '희랑대사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신륵사 조사당 목조나옹화상'(神勒寺 祖師堂 木造懶翁和尙, 1636년), '부석사 조사당 소조의상대사상(浮石寺 祖師堂 塑造義湘大師像, 고려 말~조선 초)' 등 다른 조사상들과 달리, 관념적이지 않고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르고 아담한 등신대의 체구, 인자한 눈빛과 미소가 엷게 퍼진 입술, 노쇠한 살갗 위로 드러난 골격 등은 매우 생동감이 넘쳐 마치 살아생전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이상 서술한 바와 같이 기록과 현존작이 모두 남아있는 조사상은 지금까지 '희랑대사좌상'이 거의 유일하게 알려져 있고 실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실제 인물처럼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희소성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고 불교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희랑대사라는 인물의 역사성과 시대성이 뚜렷한 제작기법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조각상은 고려 초 10세기 우리나라 초상조각의 실체를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자, 희랑대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조각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인류문화사적으로 의의가 높고 역사적ㆍ예술적ㆍ학술적 가치가 탁월하므로 국보로 지정해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존ㆍ관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법보전/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은 원래의 봉안전각은 알 수 없으나 한동안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법보전의 주불로 봉안되었다가 지금은 주불전인 대적광전의 오른쪽에 위치한 대비로전(大毗盧殿)에 봉안된 불상과 그 복장유물이다. 불상의 제작 시기는 불상의 양식과 도상, 과학적 조사를 토대로 통일신라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이는 해인사가 802년 창건된 사실에 비추어 법보전 비로자나불상이 해인사 창건시기와 크게 멀지 않은 시점에 조성되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으로서 그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점을 말해 준다.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이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한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옷차림, 무릎 사이의 부채꼴 모양의 주름, 원만한 얼굴과 당당하고 건장한 신체표현 등은 9세기 석굴암 불상 양식과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법보전 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시대 전성기 불상을 연상케 할 만큼 조각적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중앙에서 활동하던 신라조각가들이 지방의 중요 왕실사찰까지 활동반경을 넓혀 활약한 상황을 유추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와 더불어 상의 재료가 보기 드물게 향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주목된다. 이는 향나무가 우리나라 목조불상의 대다수가 소나무나 은행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차별되는 양상이다. 해인사 법보전과 대적광전의 목조비로자나불좌상 2구와 고려시대의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이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불상과 더불어 복장유물 또한 한국불교사,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이다. 해인사는 1489~1490년 동안 조선왕실의 후원을 받은 당대 최고의 고승(高僧) 학조(學祖, 15세기)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복장유물에는 고려~조선 등 여러 시기 불상의 중수과정에서 추가로 납입된 귀한 전적과 직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1490년 중수 복장유물은 조선 초기 왕실 발원 복장유물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복장에서 나온 후령통은 원래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된 것으로, 16세기 『조상경(造像經)』의 시원이 된 복장 안립 물목의 종류와 안립 절차에 대해 규명하게 된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러한 복장유물의 물목과 체계를 통해 당시 해인사의 위상과 왕실불사의 수준 그리고 고려~조선 초기까지 복장 납입 및 불상의 중수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해인사 문화유산 보물편은 다음 이야기에서.....
'문화재 관람료' 무료 전국 65개 사찰 명단과 불교 문화유산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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