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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합천(가야산) 해인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34)-보물편

by 3000포석정 2023.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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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해인사 '사찰의 역사와 유래' 및 '팔만대장경 역사', 그리고 해인사 국보 6점에 대해서는 '국보편'에서 내용을 확인하실수 있으니 아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합천(가야산) 해인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34)-국보편

 

해인사 문화유산(보물편)

종목 명칭 시대명
보물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보물 합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통일신라
보물(국보편 참조)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고려시대
보물 합천 해인사 길상탑 통일신라
보물 해인사 동종 조선시대
보물 해인사 영산회상도 조선시대
보물 합천 해인사 홍제암 조선시대
보물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조선시대
보물 합천 해인사 감로왕도 조선시대
보물(국보편 참조)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전적 고려시대
보물(국보편 참조)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전적 고려시대
보물 합천 해인사 지장시왕도 조선시대
보물 합천 해인사 내전수함음소 권490 목판 고려시대
보물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고려시대
보물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장 복장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고려시대
보물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제다라니 고려시대
사적 합천 해인사 신라
명승 가야산 해인사 일원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합천 해인사 법보전/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전적」은 국보편에서 다루었으니 관심이 있으시면 국보편을 참조하시고, 보물편에서는 해당 문화유산 내용에 대해 설명을 생략하오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좌),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가운데), 길상탑(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석조여래입상

해인사에 모셔져 있는 이 석불입상은 광배(光背)와 대좌(臺座)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목이 절단되고 어깨와 두 팔이 모두 깨졌으며 발도 없어졌다. 민머리에는 작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많이 닳고 손상되었다. 머리에 비하여 왜소해진 몸은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마치 돌기둥 같은 느낌이 든다. 좁아지고 각진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양쪽에서 비스듬히 흐른 선이 중심에서 만나 날카로운 V자형을 이루다가, 허리 부근에서 U자형으로 바뀌어 두 다리 사이로 흐르고 있다. 오른손은 팔꿈치를 꺾어 가슴 앞으로 들었고, 왼손은 내렸는데 두 팔은 몸에 바짝 붙어 있는 모습이다. 이 불상은 신체 비례의 불균형, 평면적이고 형식화된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호국신앙의 요람인 해인사의 원당암 안에 있는 다층(多層) 석탑이다. 탑신(塔身)을 점판암으로 만든 청석탑(靑石塔)으로,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는 석재이다.

땅과 맞닿아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3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을 받치는 기단(基壇)과 지붕돌은 점판암으로 구성하였다. 기단은 1단으로 밑면에는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장식하였고, 윗면은 네 모서리에 대리석 돌기둥을 세웠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남아있지 않고 지붕돌만 10층이 쌓여 있다. 지붕돌은 경사진 4면이 매우 평평하고 얇으며 밑면엔 낮은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려 올라갔다. 청석탑은 대체로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지만 이 석탑은 신라 말에 만들어져 청석탑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석등은 탑의 옆에 있으며, 탑과 거의 동일한 시대의 작품이다.

 

길상탑

해인사 일주문 가기 전 위치한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小塔)으로,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해인사 동종(좌), 영산회상도(가운데), 홍제암(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해인사 동종

해인사의 대적광전 안에 있는 높이 85㎝, 입지름 58㎝, 두께 6㎝의 종이다. 꼭대기에는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두 마리의 용이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 역할을 하고 있고, 어깨부분에는 연꽃을 새겼다. 밑으로는 돌출된 9개의 연뢰가 사각형모양의 연곽 안에 있으며, 연곽 사이사이에는 보살입상이 배치되었다. 종 중앙에는 3줄의 굵은 가로줄을 돌리고 그 위쪽에는 꽃무늬를, 아래로는 용무늬를 새겨 종 전체가 무늬로 가득 차 매우 화려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아랫부분에는 다시 2줄의 가로줄을 돌리고, 윗쪽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8괘문을 두었지만, 아랫쪽에는 아무런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연곽 아래에는 조선 성종 22년(1491)에 만들었다는 양각명문이 있다. 이 종은 조선시대 종의 변천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불교 공예품으로도 가치가 크다.

 

▶영산회상도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해인사에 있는 이 불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고, 길이 334㎝, 폭 240㎝이다. 이 그림은 본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주변에 여러 무리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영산회상의 법회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중앙에 있는 석가는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앉아 있다. 영조 5년(1729) 승려화가 의겸이 참여한 그린 그림으로 주변에 무리들이 많지만 적절하게 배치하여 시선을 탁 트이게 해주는 구도와 격조 높은 색채와 문양, 정교한 필치 등이 주목되는 작품이다. 그림에 기록된 글로 화가와 제작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어 조선 후기 불교회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홍제암

해인사에 속해 있는 암자로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수도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다. '홍제암'이라는 이름은 사명대사 입적 후 광해군이 내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에서 따왔다. 광해군 6년(1614)에 혜구대사가 사명대사의 초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1979년 10월에 해체ㆍ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법당과 생활공간의 기능을 겸한 인법당(因法堂) 형식의 건물 1동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인법당과는 달리 사명대사와 관련이 있는 여러 기능의 공간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보물)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 홍제암은 여러 기능의 공간이 하나의 건물 안에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의 암자로, 각 공간의 위계와 기능에 따라 건물구조나 양식의 수법을 여러 형태로 표현하고 있어 역사적 의의 뿐만 아니라 건축적인 가치가 크다.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좌), 감로왕도(가운데), 지장시왕도(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홍제암의 북동쪽 약 20m 지점의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사명대사탑은 조선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거대한 종 모양의 탑으로, 당당한 형태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사명대사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으로, 광해군 4년(1612)에 세웠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시대(1943년) 때,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네조각으로 깨뜨린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 이 석장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되었으며, 문장이 매우 빼어날 뿐 아니라 비문에 대사의 행적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어 역사적인 가치도 높다. 사명대사의 탑과 석장비는 본래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이러한 형식은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의의가 있다.

 

▶감로왕도

1723년 심감(心鑑), 신오(信悟), 득총(得聰)이 조성한 해인사 감로왕도는 17세기 전반에 조성된 불화임에도 구성이나 존상 표현 등에서 조선 전기의 감로도 형식이 많이 남아 있는 작품이다.

화면 구성은 제단을 중심으로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지는데, 망자를 천도하기 위해 강림하는 불보살이 그려진 상단부분이 강조된 반면, 의식이 거행되는 장면과 천도의 대상이 되는 망자의 모습이 매우 조밀하게 표현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감로도가 상단에 불보살, 중단의 의식장면, 하단의 망자 등으로 구성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해인사 감로도는 불보살을 비롯한 각 존상의 세부 묘사와 녹색, 홍색을 중심으로 분홍, 노랑, 청색 등이 조화가 뛰어나다. 또한 배경을 이루는 청록산수는 안견화풍으로 그려져 중앙화단과 불화간의 영향관계를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지장시왕도

'합천 해인사 지장시왕도(陜川海印寺地藏十王圖)'는 1739년에 대시주 처옥(處玉)의 발원에 의해 수화원 혜식(慧湜)을 비롯한 6명의 화승이 관음전 불화로 조성하였다. 구도에서는 지장삼존과 시왕, 판관, 지옥사자, 선악동녀, 옥졸 등 31명에 달하는 인물들을 밀도 높게 표현하되, 중앙의 본존에 비하여 권속들을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함으로써 많은 권속들을 효과적으로 배열하였다.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형태에 안정감이 있고 신체 비례가 적절하며, 채색은 녹색과 적색을 중심으로 차분하면서도 안정된 색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인물묘사에서 수염 하나하나까지도 섬세하게 그려낸 것에서 화승들의 필력이 숙달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이 불화는 현존하는 명부전 지장보살도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된 불화로, 18세기 전반 경상남북도 지역 불화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전수함음소 권490 목판(상좌),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상우), 제다라니(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내전수함음소 권490 목판

'합천 해인사 내전수함음소 권490 목판(陜川海印寺內典隨函音疏卷四百九十木板)'은 1245년(고려 고종 32)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하여 완성한 경판이다. 내전(內典)은 부처의 설법을 담은 불경이고 음소(音䟽)는 음에 대한 해석을 뜻하는 것으로, 내용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여섯 가지 실천덕목인 육바라밀다(六波羅蜜多)를 설명한 것에 대한 주석이다.

지금까지 대장경 목록에도 없이 인쇄본만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 경판은 대장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陜川 海印寺 願堂庵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은 해인사 경내 부속 암자인 원당암(願堂庵)의 보광전(普光殿)에 봉안된 삼존불상으로, 이곳에서 발견된 8건 23점의 복장유물 역시 지정대상에 포함된다.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설법인(說法印)의 수인(手印)을 한 아미타여래상과 화불(化佛)을 새긴 보관(寶冠)을 쓴 관음보살, 민머리의 지장보살로 구성된 불상으로, 아미타삼존 도상을 정확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이러한 삼존상 형식은 고려 후기에 새롭게 등장한 도상(圖像)으로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고려 또는 조선시대 작품으로 삼존상을 주불전에 봉안한 사례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금산 신안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 등 남아있는 사례가 극히 드물어 희소성이 크다.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고려 후기부터 본격화된 아미타여래와 관음, 지장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 도상을 보여주며, 조선 초 15세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어 당시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사례가 되는 작품이다. 또한 제작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원래의 봉안 장소를 벗어나지 않고 제작 당시 모습 그대로 신앙의 대상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 복장유물을 통해 제작배경과 참여자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존상과 복장유물을 함께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제다라니

2017년 8월 원당암 목조아미타요래삼존상의 개금불사를 준비할 때 본존불의 목조아미타불좌상에서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는 개별 권의 장차가 모두 인출되어 있는 상태이며, 전체적인 보존 상태도 상당히 양호하다. 인출 시기는 변상도(變相圖)와 글자의 마모 상태 등으로 보아 15세기 경에 인출된 후쇄본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제다라니' 1권 1첩은 15세기 해인사의 사상적 경향과 함께 출판인쇄문화의 실체와 역량, 고려 우왕 당시 고려사회의 불교 사상적 경향 등 기초자료로서 역사ㆍ문화적인 가치를 지닌다. 더욱이 이 '제다라니' 는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본으로서 희소성이 매우 높다. 제다라니 변상도는 1375년이라는 제작시기와 전성척(田成尺)이라는 각수(刻手), 도상 명칭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어 이 시기 변상도 연구 및 고려불화 연구에 기준자료가 된다. 이러한 사유로 보물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제다라니'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내용의 다라니라는 점, 해당 원판을 복원할 수 있는 원천자료라는 서지학적 중요성과 더불어 변상도 또한 고려 불교미술사에 중요한 자료라는 점 등을 근거로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므로 보물로 별도 지정할 가치가 있다.

 

<해인사 원경(좌)과 가야산 해인사 일원(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적/명승-합천 해인사 원경, 가야산 해인사 일원

해인사를 두고 있는 가야산은 높이가 해발 1,430m이며, 우뚝하고 기이한 모습으로 우리나라 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신령스러운 산이다. 이곳의 돌과 물, 붉은 소나무숲은 다른 절이나 명산에서도 보기 힘든 자연경관을 갖고 있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서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애장왕 3년(802)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순응과 이정, 두 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2백여 년간 7차례나 불이 나서 건물 대부분이 타버렸고,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세운 것들이다. 현재 절 안에는 고려 고종 23년(1236)에서 1251년까지 15년간에 걸쳐 완성된 호국안민의 염원이 담긴 고려대장경판(국보)이 있다. 그 밖에 장경판전(국보), 반야사지원경왕사비(보물), 석조여래입상(보물), 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합천 치인리마애불입상(보물)이 있다. 뛰어난 가야산의 자연경관과 역사의 숨소리가 살아 있는 해인사 지역의 문화유산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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