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8.29~1944.6.29)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더 이상 집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1896년 선생은 홀연히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선생은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9년 선생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 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불교 측 인사들과의 접촉을 위해 범어사까지 다녀오는 등 동분서주하였고, 해인사 승려로서 서울에 올라와 있던 백용성 선사를 민족 대표로 서명하게 하였다.
한국 문학사에서 선생은 근대적 시인이요, 3.1운동 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88편의 시를 모아 1926년 『님의 침묵』이라는 첫 시집을 발간하였고, 시조와 한시를 포함하여 모두 300여 편에 달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한국근대사와 근대불교사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의 가치는 확고하다. 불교계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이 희박해져 가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존재 자체가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스님의 행적을 두고 동시대를 살았던 지성들은 말을 아끼지 않는다.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연구자였던 위당 정인보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으니, 조선 청년은 만해를 배우라"라고 했다. 동화사 학인들과 만세 운동을 부르기도 했던 고봉(1890~1961) 스님 역시 "한용운은 조선만이 아니라 세계의 한용운"이라고 극찬했다. 더욱이 벽초 홍명희(1888~1968)는 "7000 승려를 다 합해도 만해 1인을 당하지 못하니, 만해 1인을 아는 것은 1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평가하였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때 더한 생동감과 진한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만고(萬古)에 전하는 이름 없는 비석 글이기 때문이다. 현재 후학들의 스님에 대한 추모는 문학과 종교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고는 있지만, 그 원천은 한국불교를 포함한 민족의 진정한 독립과 자생을 위한 고뇌의 행적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백범(白凡) 김구 선생은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1879년(4세)에 천연두를 앓아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9세가 되던 1884년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합격자 이름이 나도는 타락한 과거시험에 실망을 느꼈다. 그 뒤로 김구 선생은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 오기자, 육도, 삼략 등의 병서를 읽어 나갔다. 관상 공부를 하던 김구 선생은 자신의 관상이 좋지 않아 크게 실망하다가, 그 책에 '상 좋은 것은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은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는 구절에 빠졌다. 아무리 관상이 좋아도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이 말에 김구 선생은 호심인(好心人)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1895년 명성황후 살해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온 나라에서 의병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를 다녀온 김구 선생은 안악으로 되돌아오다가 한 사건과 마주쳤다. 1896년 2월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인 '스치다'를 만난 것이다. 이때가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넉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구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히 국모(國母)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김구 선생은 일본인이 숨기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과 함께 주소와 이름을 써 붙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인이 흔하지 않던 시절인 데다가, '국모시해사건'이 터진 직후였고, 게다가 칼을 숨기고 다니는 일본인을 바라보는 김구 선생의 눈에는 그가 미우라이거나 그 패거리인 장교 또는 밀정으로 보인 것은 당연했다.
무너져 가는 나라를 보며 가슴 가득 원한을 가진 21세의 피 끊는 청년이 우연히 마주친 일본 흉한을 그댈로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1897년 7월 사형을 언도받고 동년 8월 26일 사형 집행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사형 직전에 집행정지명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다. 먼 뒷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두 번의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법무대신이 김구 선생의 이름과 함께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광무황제(고종)의 재가를 받았다. 승지 가운데 한 사람이 김구 선생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 인 것을 발견하고, 재가가 끝난 서류를 광무황제에게 다시 보이면서 의견을 구했다. 이에 광무황제는 어전회의를 열어 논의한 끝에 사형집행을 정지시켰다. 이에 김구 선생은 죽음 직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띄지 않았더라면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더구나 그 명령이 전화로 통보되었는데, 서울에서 인천 감리서까지 전화가 개통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 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석방될 날은 기약할 수 없었다. 이에 김구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으려면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년 3월 9일 밤 감옥을 탈출하였다. 김구 선생은 호남지역을 돌아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고,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썼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경전을 배우고 외웠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 생활은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 텃골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누구도 김구 선생을 신고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민심이었다. 이외에도 승려로서 봉선사 출신 독립운동가 운암 선생,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태허스님 등이 있고, 또한 사찰로서도 대구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보현사, 독립운동가들의 피신처 천년고찰 옥천사 등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켜 온 사찰이며 독립운동가들의 중요한 대피처와 활동 장소가 되었다.
독립 운동가들의 정기가 어린 백담사와 마곡사 사찰 기행은 다음 편에...
2023.02.23 - [힐링 사찰 여행] - 일제 시대 우리 민족 선각자들 정기가 어린 사찰(2)(공주 마곡사)
2023.03.01 - [힐링 사찰 여행] - 일제 시대 우리 민족 선각자들 정기가 어린 사찰(3)(인제 백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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