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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사찰에서 자주 보는 한자어

by 3000포석정 202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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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신성에 있는 화산은 험준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이 화산이 얼마나 험준한지 이 산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한퇴지투서처(韓退之投書處)에 관련된 이야기다. 한퇴지투서처는 화산의 많은 등산로 중 '창룡령(蒼龍嶺)'이라는 곳에 있다. 검푸른 용의 등줄기를 닮았다 하여 창룡령이라 불리는, 칼등 같은 가파른 절벽 능선 위의 길이다. 경사도가 40도 정도 되며 530개의 돌계단이 이어진다. 이 길도 걸어 내려왔는데, 누구나 심장이 쿵쾅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두려움을 느끼는 길이다.

 

당나라 최고 문장가였던 한유(韓愈, 768~842)가 화산에 올라 하산하느 길에 이 창룡령에 이르게 되었다. 하늘에 닿을 듯한

바위 봉우리가 상하 수직으로 드리워졌고, 바위 산의 능선은 칼날과 같았다. 좌우의 낭떠러지 골짜기가 천길이나 되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그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공포에 휩쓸린 그는 결국 방성대곡을 했다. 그리고 절망 속에 붓과 종이를 꺼내 유서와 구원 요청서를 써서 절벽 아래로 던져 내렸다. 마침 약초 캐는 사람이 있어 그를 발견해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유가 너무나 심한 두려움에 떨어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야 데리고 내려갈 수 있었다.

 

후세인들은 이 일을 기념해 암벽 한 곳에 '한퇴지투서처'라는 글귀를 새겼다. 지금도 이 글씨는 남아있다. '퇴지'는 한유의 자이다. 이 이야기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우리가 특히 험한 길을 걸을 때는 정신을 차리고 발아래를 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고를 당하는 실수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고각하

사찰에 가면 만나는 글귀 중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다. '다리 아래를 잘 살펴라'는 의미의 이 글귀는 사찰에 가면 종종 볼 수 있다. 법당과 선방 앞, 스님들의 처소나 외부인이 머무는 곳의 섬돌 위 마루 등에 이 글귀를 붙여놓고 있다. 해남 달마사 미황사의 경우, 대웅보전 옆에 있는 세심당 건물의 섬돌 위 마루 몇 군데에 이 글귀를 붙여놓고 있다. 세심당은 외부 손님이 머물려 사용하는 건물이다.

 

동해안 절벽 위에 있는 양양 낙산사의 홍련암 가는 길 초입에도 이 글귀를 담은 소박한 팻말이 하나 서 있다. '조고각하'라는 글귀가 유래된 일화는 선어록인 '종문무고(宗門武庫)'와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에 나온다. 오조산에 주석한 오조 법연 선사에게는 뛰어난 제자 세 명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삼불이라고 불렀다. 불감 혜근, 불안 청원, 불과 원오이다. 법연이 어느날 이 세명의 제자와 함께 어디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 들고 있던 등불이 꺼지고 말았다. 어둠을 밝혀 주던 등불이 꺼지자 칠흑같이 캄캄해서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만 것이다. 이때 스승인 법연이 물었다. "그대들은 이 순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말해보라." 먼저 혜근이 대답했다. "붉은 봉황새가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에서 춤을 춥니다." 청원은 "쇠 뱀이 옛길에 누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오가 말했다. "다리 아래를 살피십시오." 그러자 법연은 "우리 종문을 망칠 놈은 원오이다. 스승인 법연 선사의 물음에 각자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세 제자는 각기 자신의 경지에서 답을 했고, 법연은 '조고각하'라고 답한 원오를 "우리 종문을 망칠 놈"이라며 특별히 칭찬한 것이다.

 

이 일화에서 유래된 '조고각하'라는 글귀는 쉬우면서도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 수행자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요체를 잘 담고 있다. 그래서 이후 수많은 선 수행자 사이에 회자되면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 글귀는 단순히 발아래를 살펴서 신발을 잘 신고 벗을 것을 주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유혹이 난무하는 혼탁한 세상에 휩쓸려 불행한 삶을 살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살 수 있도록 언제나 자신이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잘 살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육체적인 다리만 아니라 '마음의 다리'도 잘 디디고 있는지 살피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은 즐거운 감정과 동일시하고, 고통은 불쾌하거나 나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번뇌의 근원이 고통이나 슬픔 자체에 있지 않고, 이 같은 일시적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깨닫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오는 즐거움과 행복은 차원이 다른다. 이런 진정한 즐거움에 이르기 위해서는 항상 '조고각하'의 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불이 꺼져 캄캄해졌는데, 발 아래는 잘 살피지 않고 당황하며 두려움에 빠져 있는 꼴이 아닌지 돌아보며 살 일이다. 글귀가 꼭 '조고각하'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선비들은 '경(敬),자를 거처어ㅔ 크게 써붙여놓고 마음을 챙겼다. 글귀가 아니라도 좋다. 무엇이든 맑은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수단을 한 가지씩 가지고 일상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양심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조고각하'이다. 점점 극단으로 흐르는 사람이 늘고, 자신의 주장과 이념, 지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지식인이 많아지느 것도 '조고각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발밑, 내 주변, 내가 처한 작금의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한번 뒤돌아 생각해 보라'는 뜻이 '조고각하'이다.

 

<하동 쌍계사 일주문에 있는 "입차문내 막존지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입차문내 막존지혜

우리가 사찰을 찾는 경우 절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게 되는 문을 일주문(一柱門)이다. 여기서부터 사원 경내임을 알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둥을 일직선상으로 세운 것에는 사찰의 경계임을 표시하는 이외에도 일심(一心)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는데, 세속의 온갖 번뇌로 들끊는 어지러운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오로지 진리에 귀의하는 한마음으로 들어오라는 뜻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일주문 또는 불이문에는 일반적인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문안으로 들어와서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세간의 알음알이로 해석하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생각에 의해 이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버릇을 지니고 있지만, 실상 우리 생각이라는 것은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왕왕 스스로의 욕망이나 이기심, 감정 따위에 얽매여 떠올리는 번뇌망상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같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각기 다른 생각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이것이 맞니 저것이 틀리니 하는 식의 시기와 다툼을 벌이게 되는데, 부처님께 귀의하여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할 때는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세속의 알음알이를 잠재우는 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주문에 걸어둔 '입차문내 막존지해'란 구절은 중생들의 속세의 마음을 경계하면서 이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로 이르는 입구임을 일깨우는 구실을 하고 있다.

 

9세기 중국의 선승으로 위산이란 분이 있었다. 그의 어록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승가의 밠미 수향자에게 교재로 쓰일 만큼 널리 알려졌다. 그의 문하에 키가 7척이나 되고 총명과 재주가 비상하게 뛰어난 향엄이란 학인이 있었다. 위산은 향엄이 큰 그릇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어느 날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을 떠나서 너의 본래 면목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해 보라." 향엄은 일 생각하고 저리 따지면서 몇 마디 대답해 보았지만 스승은 모두 아니라고 한다.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가지고 다니던 여러 가지 책들을 꺼내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고 들은 것을 젖혀 놓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다시 위산 앞에 나아가 가르쳐 주기를 청한다. 그러나 위산은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 소견이지, 그게 너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 향엄은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아, 가지고 있던 책을 다 불살라 버리고 홀로 수행한 끝에 본래 면목을 깨닫게 된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은 텅 빈 데에 오묘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텅 비우지 않고는 새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자기 생명의 물을 고이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라고 타이른다. 여기서 지해(知解)란 기존에 알고 있던 갖가지 상식을 말함이며 이를 불교에서는 알음알이라고 한다. 알음알이라고 하는 것은 선종(禪宗)의 용어이며 이는 자성을 찾음에 있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상식이나 지식으로써 이리저리 따지고 들어서 깨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이러한 것을 제일 꺼리고 있음이다. 왜냐한면 마음자리는 그렇게 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로 말만 하면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운을 떼고 말한다면 이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의 테두리 안에서 말을 하는 것일 뿐이기에 모두 알음알이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함에 있어서는 학벌이나 직위 등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의 세계에 들어 오려면 이리저리 따지고 들어서 시시콜콜하게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비로서 새 눈이 열릴 수 있다는 간절한 당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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