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위치한 내설악의 명찰인 백담사(百潭寺)는 일제감점기 때 독립운동을 주도한 만해스님의 수행처로 유명하다. 내설악의 아주 깊은 오지에 자리 잡고 있는 백담사는 예로부터 사람이 좀처럼 찾기 힘든 구중심처의 수행 도량이었으며, 지금도 방문하기에 쉬운 사찰은 아니다. 백담사에 가기 위해서는 공용주차장에 주차 후 버스로 18~20분 타야 되며 만약 걸어간다면 7km로 2시간 종도 소요되는 거리다.
만해스님이 저술한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647년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해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했다고 한다. 이후 1772년(영조 51)까지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불리다가 용대리로 이전해 백담사로 개칭했다. '백 번째 연못자리에 세웠다'라고 해서 백담사라 불린다.
백담사 유래
백담사는 원래 강원도 낭천(狼川. 지금의 화천) 땅에 비금사(琵琴寺)라는 이름으로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포수들이 짐승을 잡으로 자주 들리고 살생을 하는 등 불도에 어긋난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자 주지스님의 고민은 늘어만 갔다. "부처님 도량에 왜 자꾸 사냥꾼들이 몰려와 살생을 저지른다 말인가." 비금사 주지스님은 날마다 부처님 전에 기도할 때마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살생을 저지르지 않게 해 달라"는 발원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스님은 마침내 큰 결단을 내렸다. "도량을 옮겨야겠어. 이 자리는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할 자리가 되지 못해." 그리하여 비금사 주지스님은 짐을 꾸려 인제군 한계리로 향했다. 한계리에 부처님 사리를 모실 탑을 세우고 '한계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살생의 화를 면하니, 화마(火魔)가 절을 매번 삼켜버리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무슨 방도가 정녕 없는 것인가?" 주지 스님은 해법을 찾기 위해 산신기도에 들어갔다. 주지스님이 산신기도에 들어가 100일째 되던 날 현몽을 통해 응답이 왔다. 설악산 산신령이 자리를 정한 '한계사' 절터는 화기(火氣)가 강해 불을 피할 수 없는 자리오. 그러니 매번 화재가 발생해 큰 피해를 입는 것이니 절터를 옮겨야 하오", 그리하여 주지스님은 한계사를 폐하고 인제군 용대리 암자동으로 절을 옮겨 영추사(靈騶寺)라고 불렀다. 꿈에서 말을 탄 산신령의 이름을 따서 신령 령(靈) 잘에 말 먹일 추(騶) 자를 써서 지은 사찰명이었다. 이제는 화마에서 벗어나겠지. 이렇게 안심을 한 주지스님의 바람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절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을 전부 태워버리고 말았다. 낙담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스님의 꿈에 다시 산신령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든은 당신의 수행력을 가늠해 보기 위한 불, 보살들의 시험과정이었소. 이제 내 말을 잘 듣고 행하면 다시는 화마로부터 피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내일 동이 트거든 설악산 대청봉으로 올라가 보시오. 그곳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100번째 되는 연못자리에 터를 잡고 사찰을 세우시오. 그리고 절 이름을 '백담사'라고 하시오" 산신령이 사라지자 꿈에서 화들짝 깨어난 주지스님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날이 새기가 무섭게 설악산의 최고봉 대청봉으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굽이 굽이 물결치는 내설악 계곡에는 크고 작은 연못(潭)이 아련히 줄을 잇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연못을 계속 세어가던 스님은 용대리에 발길을 멈췄다. "저기다!" 100번째 연못자리에 눈길이 멈춰졌다. 인부를 동원해 연못자리를 메운 뒤 절을 세우고 백담사(百潭寺)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그러자 백담사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백담사사적기』로 추정해 볼 때 이때가 조선 세조 2년(1457)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때부터 영조 48년(1772)까지 300여 년동안 화재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영조 51년(1775)에 화재를 만나고 다시 재건해 심원사(尋源寺)로 불리다가 정조 때 백담사로 다시 개명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때 불탄 뒤 재건되기도 했다.
백담사는 오래된 고찰 역사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인 고풍스러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 너른 평지에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칠성각과 선원, 요사채, 관음전 그리고 만해기념관까지 두루 배치됐지만 사찰엔 연륜의 흔적이 묻어있지 않고 오랜 풍상(風霜)을 함께 겪은 잎이 무성한 아람들이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무려 일곱 번이나 화가(火魔)가 절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계사'로 시작된 절은 '비금사',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축사', '백담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왠지 새 절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다. 이 절이 유명해진 것은 만해(卍海) 한용운과 일해(日海) 전두환 전 대통령 때문이다. 만해는 일본 경찰을 피해 이곳에 머물면서 불교유신론(1910년)과 님의 침묵(1925년)을 집필한 곳이며, 만해의 승려생활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백담사는 만해의 정신이 깃든 곳으로 많은 탐방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백담사에 만해기념관과 만해당, 만해교육원 등이 건립되면서 백담사에서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그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교육장이 되었다. 백담사는 근대사에 있어 개화가 일찍 이루어진 곳이다. 원산, 건봉사로 이어지는 개화정신이 백담사에도 닿았다. 만해스님은 이런 시대적 배경아래서 동서사상을 골고루 섭취해 위대한 사상을 탄생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백담사에 만해기념관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기념관과 교육원에는 만해스님의 불교사상, 일대기, 유품이 전시되고, 불교사상 강좌 등이 열린다. 만해기념관에는 지하 1층 지상 1층 1백10평 규모로 모두 8백여 점의 유물이 상설전시됐다. 이와 함께 기념관 내부 한편에 만해스님의 일대기를 비디오로 상영하고 있어 만해스님을 기리는 후학들이 만든 조각품 초상화 등도 선보이고 있다. 또한 기념관 앞뜰에는 시 「나룻배와 행인」을 새긴 비와 만해스님 흉상이 나란히 서 있다.
또한 백담사는 선원으로도 유명하다. 백담사 위로 출입통제 표지를 지나 150m가량 오솔길을 올라가면 무금선원(無今禪院)의 무문관(無門關)이다. 화장실이 딸려 있는 2평 크기의 방 12칸의 문은 모두 바깥에서 잠겨있다. 독방에 들어가 3개월이면 3개월, 3년이면 3년 시간을 정해 놓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방안에서만 '폐문정진'하는 곳이다. 하루에 단 한번 오전 11시 작은 공양구를 통해 식사만 전해질뿐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된다. 고독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하는 폐문정진은 눕지 않고 참선하는 '장좌불와'와 잠자지 않고 수행하는 '용맹정진'과 함께 가장 어려운 수행법의 하나로 손꼽힌다. 정휴스님이 쓴 『백담사 무문관 일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앉아 있으니 간밤에 나와 함께 머물렀던 고요가 방 안으로 흩어져 있다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감옥의 독방과 다름없었다. 거기가다 출입하는 문을 잠가 놓았기 때문에 나갈 곳이 없었다...열한 시가 되자 창문 쪽으로 뚫어 놓은 구멍으로 점심 도시락이 들어왔다. 이곳에 와서 독방에서 홀로 맞이하는 공양시간 이다. 앞으로 하루 한 끼만 먹고 석 달을 버티어야 한다.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밥을 구하는 생각을 버려야 초심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무문관의 반대쪽 백담사 만해당 뒤편에는 조계종의 기본선원이 있다. 젊은 스님들이 본격적인 선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공부를 하는, 일종의 '불교사관학교'이고 스님들이 이곳에서 엄격한 규율 아래 교육을 받고 있다. 백담사는 내설악으로 오르는 길잡이다. 백담사를 거쳐 계곡을 계속 오르면 영시암이 나오고 마등령쪽으로 오르면 오세암, 수렴동대피소를 지나 구곡담으로 해서 오르면 봉정암이다. 봉정암은 해발 1,244m로 높기도 하거니와 가는 길이 험해 눈 쌓이는 겨울철엔 일반인들의 출입이 수시로 통제된다. 이곳에 있는 오 층 석탑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뇌사리보탑이다. 탑 아래로 펼쳐진 장엄한 설악능선이 장관이다.
보통 역사가 오래된 사찰들이 국보와 보물 등 각종 유물들이 있는데 반해 백담사의 경우 잦은 화재로 인해 오래된 유물은 볼 수가 없다. 대신 민족정기를 지키고자 독립운동을 해온 우리 민족 선각자의 정신적 유물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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