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는 우리나라 7대 산지 승원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7대 산지 승원은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를 일컫는다. 봄에는 마곡사의 봄 벚꽃 풍경이 좋고 가을에는 갑사의 가을 풍경이 좋다는 뜻으로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 일컬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난 곳이며 예로부터 길지로 이름난 곳이다. 공주 서쪽 유곡과 마곡사는 예로부터 전란, 흉년, 전염병 등의 삼재가 침범하지 않는 전국 10대 명당 중의 한 곳이다. 물이 태극 모양이나 S자로 흐르는 곳은 거의 명당이다. 태극 모양이면 물이 느리게 흐르면서 주변에 수기(水氣)를 충분하게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곡사 인근 지역은 변혁의 시대에 생명과 안전을 의탁하여 찾아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백범 김구 선생도 쫓겨다니다가 이러한 큰 시대 흐름에 휩싸여 마곡사까지 오게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경내에서 관찰되는 전체 지형은 바람이 모이고 물길이 둘러싸는 명당으로 그 땅의 형상이 마곡천 물줄기를 자양분으로 하여 둥그렇게 피고 있는 한 송이 극락세계의 연꽃 같다.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이래, 고려 명종 2년(1172)에 보조국사가 중창한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자장 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하더라도 30여 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지금은 대웅보전과 대광보전, 영산전, 명부전, 사천왕문, 해탈문 등의 전각들로 가람을 이루고 있으며, 가람 구성이 매우 독특하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북원으로 두 개의 가람이 공존하고 있는 형태이며, 남원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일곽을 이루고, 북원은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별도의 일곽을 이룬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라는 마곡사는 다른 교구 본사 사찰들과 달리 그리 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조계종 교구 본사가 아니라도 요즈음 웬만한 사찰들은 최근들어 엄청난 중창불사로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대형 건축물들을 건축하여 본래의 모습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이곳 마곡사는 최근에 사찰의 전각들을 새로 건축하거나 중창시킨 흔적들이 거의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을 아주 담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신라 말 도선대사는 마곡사터가 삼재가 감히 들지 못하는 곳이며, 유구와 마곡 두 냇물 사이의 터는 능히 천명의 목숨을 구할 만하다고 칭찬했다. 그 두 개울 사이의 터가 영산전이 자리 잡은 남원이다. 남원 일곽에 가람을 창건한 이후, 사찰을 확장하면서 개울 건너 북원 일곽을 개창한 것으로 추정되며, 새로운 전각들이 들어선 북원이 주가람이 되고, 기존의 남원 가람은 영산전 일곽으로 변화되어 부가람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거쳐 불이문 또는 해탈문으로 들어서는 것이 일반적인 산문의 흐름인데, 이곳은 본래 일주문이 없었기 때문에 해탈문이 첫 관문이다. 따라서 일주문을 지나면 부처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나, 마곡사는 해탈문을 지남으로서 속세를 벗어나 부처의 세계 즉 법계(法界)에 들어가는 것이다. 정면의 중앙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편에는 금강역사상과 보현 및 문수동자상을 봉안하고 있다.
영산전 현판은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서 이 절에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면서 남긴 필적이라고 한다. 당시 김시습은 강원도와 평안도를 떠돌아다니다가 경기도를 거쳐 이곳 충청도 깊숙한 산골 마을 공주 마곡사로 들어왔다. 그때 세조는 김시습이 마곡사에 은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행차를 했었던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세조가 친형인 문종의 아들 단종을 영월로 유배 보낸 후 사약을 내려 죽음에 이르게 하고 또 집현전 학사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을 능지처참하는 장면을 똑똑히 본 사람이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 복위에 참여했던 사육신과 충신들은 차열형을 받으면서 몸의 일부분은 한강의 남쪽에 떨어져 있었고 또 다른 일부분은 한강의 북쪽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명을 내렸고 그때 찢어진 시신들을 새벽 시간을 틈타 몰래 수습하여 노량진 부근에 묻었던 사람도 바로 김시습이다. 그런데 세조는 사육신들의 시신을 몰래 거두었던 그 김시습이 그리워 공주 마곡사로 찾아온 것이다. 김시습을 만나면 지금까지 자신이 벌였던 행위가 조금이라도 위로될 것 같았던 수양대군 세조...하지만 매월당 김시습은 단호했다. 세조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접해 듣고 곧바로 마곡사를 떠났다. 며칠 후 세조가 공주 마곡사에 당도했지만 김시습은 이미 마곡사를 떠난 뒤였다. 이때 세조는 이곳 마곡사의 영산전(靈山殿)이라는 현판을 직접 쓰고는 "김시습이 나를 버리고 떠났으니 연을 타고 갈 수는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소를 타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때 세조가 이곳 마곡사에 흔적을 남겨놓고 간 것이 저 영산전이라는 현판과 한양에서 올 때 타고 내려온 세조대왕 연(조선시대 임금이 타던 가마)이다. 당시 세조대왕이 타고 왔던 연은 지금은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깨끗이 전시되어 있다.
영산전은 마곡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내부에 천불과 함께 칠불좌상을 모시고 있다. 칠불좌상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출현한 일곱 부처님인 과거 칠불로 여겨진다. 천불상은 1681년 수화승 단응을 중심으로 20여 명의 조각승이 함께 제작한 작품으로, 조선 후기 불상 중 천불상을 주존불로 제작된 유일한 사례로 꼽힌다. 석가모니불은 높이가 82cm이고, 나머지 6불은 71~73cm이다. 1681년 2월에 제작을 시작하여 그해 6월에 완성되었으며, 모두 목조로 되어 있다. 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거나, 한 손을 어깨 위로 올린 설법인을 하고 있다. 영산전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당시의 광경인 영산회상을 재현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 제자를 모시거나 혹은 십육나한이나 오백나한을 모시기도 한다. 그러나 마곡사의 영산전에는 한가운데에 과거 칠불을, 그 주위에 1,000분의 부처님을 모신 것이 특징이다.
대광보전은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처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정면을 바라보고 봉안되는데, 부처가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서방 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가끔 이렇게 앉기도 하는데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이곳 마곡사 대광보전에서는 아미타불이 아닌 비로자나불이 이처럼 앉아 있다.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은 깍지를 끼고 오른손 검지로 왼손 검지를 덮어 누르고 있는 형태의 수인으로 일반적인 지권인의 형태와 다른 독특한 모습이며, 고창 선운사의 비로자나불과 손의 위치가 반대 형식이다. 일반적인 지권인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의 엄지로 살짝 누른 형태이며, 때때로 왼손과 오른손의 위치가 바뀌기도 한다. 한편 조선시대의 비로자나불 지권인은 주먹을 쥔 오른손 전체를 왼손으로 감싼 형식을 취한다. 대광보전에는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하나는 청기와에 얽힌 이야기다. 대광보전의 용마루에는 중간에 청기와가 있는데, 사람이 사후에 염라대왕 앞에 가면 염라대왕이 "마곡사 청기와를 보았느냐"라고 묻는다고 한다. 그때 보았다고 대답하면 극락에 가까워진다는 얘기가 있으며, 또 하나의 이야기는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있지만, 카펫으로 덮여 있어 확인은 곤란하다. 조선 후기에 한 앉은뱅이가 불구를 고치기 위해서 이 절을 찾아와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리며 틈틈이 삿자리를 짰다. 백일기도가 끝나고 삿자리 일도 다 끝나 밖으로 나가는데 그의 정성에 부처님이 감복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문을 걸어 나갔다고 한다.
백범당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1898년에 탈출하여 마곡사에 은신하던 중,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하여 수도한 곳이다. 백범 선생이 마곡사에 출가한 이유는 감옥을 탈옥해 쫒기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일부는 위장 출가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선생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군을 보고 명성왕후를 살해한 미우라 공사 일행으로 여겨 살해한다. 감옥에 있는 동안 신학문을 접하고는 위정척사파에서 개화파로, 왕정옹호론자에서 공화주의자로 변신하다. 그리고 젊을 적 치기 어린 행동을 뉘우치고 더 크고 긴 호흡의 부국 강화를 꿈꾸며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떠돌며 도피 생활을 한다. 긴 도피생활에 지칠 무렵 공주 갑사(甲寺)에서 만난 이서방을 따라 마곡사로 간다. 『백범일지』는 출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마곡사로 가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서방은 홀아비로 몇 년 동안 사설 글방의 훈장으로 지냈고, 지금은 마곡사로 가서 중이나 되어 일생을 편안하게 지내려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내게도 그리하기를 권했는데, 나도 얼마간 뜻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갑작스레 생긴 문제였으므로 섣불리 결정할 수 없어서 이야기만 하였다. 하루 종일 걸어서 마곡사 남쪽 산꼭대기에 오르니, 해는 황혼인데 온 산에 단풍잎은 노릇노릇 불긋불긋하였다. 가을바람에 나그네의 마음은 슬프기만 한데, 저녁 안개가 산 밑에 있는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길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입문하라고 권고를 들려주는 듯하였다.'
『백범일지』 도진순, 돌베개
2년간의 감옥생활과 사형선고와 탈옥, 영호남과 충청도로 긴 도피 생활에 지친 20대 초반 선생의 복잡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출가해서 세속을 다 잊고 편히 살 것인가, 아니면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는 데 몸 받칠 것인가? 백범 선생은 고뇌를 하며 출가하였으며 출가 수행자가 된 백범은 산내 암자인 백련암에 기거하며 경전을 배우며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원종스님'이라는 법명을 받게 된다. 백범당은 원래 건물이 없었으나 역사 고증을 거쳐 2004년에 새롭게 복원된 것이다. 해방 후 1946년 여러 동지들과 마곡사를 다시 방문한 백범 김구 선생은 이곳에 향나무를 심고 옛일을 회상했다고 한다. 선생의 진영(眞影)과 당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이 마곡사를 찾는 사람들의 발과 눈을 사로잡는다. 백범 선생은 마곡사를 떠난 지 근 50년 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원각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향나무를 심었다 한다.
'춘마곡추갑사' 라는 말처럼 봄에는 벚꽃과 함께 아름다운 사찰로 꽃구경 가시기를....
공주 마곡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13)
마곡사와 백담사, 일제 시대 우리 민족 선각자들 정기가 어린 사찰(1)
인제 백담사, 일제 시대 우리 민족 선각자들 정기가 어린 사찰(3)
100대 명산 계룡산과 갑사
'힐링 사찰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속 신앙과 불교 이야기 (0) | 2023.02.23 |
---|---|
사찰에서 자주 보는 한자어 (0) | 2023.02.23 |
마곡사와 백담사, 일제 시대 우리 민족 선각자들 정기가 어린 사찰(1) (0) | 2023.02.22 |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불교 용어 (1) | 2023.02.22 |
여주 신륵사, 조선시대 왕릉과 수호사찰 능침사(陵寢寺)(2) (0) | 2023.02.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