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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보문사와 향일암, 간절하게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해수관음도량(1)

by 3000포석정 202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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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가슴이 답답하고 의욕이 떨어질 때, 또는 새로운 희망을 찾고자 할 때 주로 산과 바다로 달려간다. 아침부터 운전해서 바닷가에 다다를 때쯤이면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돼서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특히 아침 바다 해변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고 무언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것은 원시 시대부터 우리의 무의식 어딘가에 깊이 새겨져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기도처로 4대 해수관음도량 중 3곳(석모도 보문사, 돌산도 향일암, 남해도 보리암)은 바다를 바라보는 섬에 있고, 나머지 한 곳(낙산사 홍련암)은 강원도 양양 절벽에서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섬에 있는 사찰도 이제는 전부 다리가 놓여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우리 민족의 삼대 기도 원형은 산신 기도, 용왕 기도, 칠성 기도를 말하며, 이를 한민족 삼신신앙이라고 한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면서 우리 전통 신앙의 삼신(三神)인 산신ㆍ용왕신ㆍ칠성신은 사찰에 습합(習合)[1] 되는 과정을 거친다. 산신은 재물을, 용왕신은 기복을, 칠성신은 수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삼신을 통틀어 광의의 산신이라고 한다. 그 결과 산신 중 하나인 독성은 나반존자로, 용왕신은 해수관음보살로 불교의 신앙 대상으로 모습이 바뀐다. 따라서 해수관음보살은 우리 전통의 용왕신이 습합 과정을 거쳐 불교식으로 변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4대 기도처에 있는 해수관음보살은 원래 우리 전통 용왕신의 불교식 형태일 수도 있다. 용왕기도는 ㅂ다의 신에게 드리는 기도를 말하며, 용왕기도가 지금은 해수관음보기도로 변형되었으며 한반도에 들어온 불교와 훌륭하게 용합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바다에서 꿈틀거리는 커다란 용의 등에 올라타 서 있는 모습이 해수관음의 대표적 상징이다. 지금의 4대 관음기도처는 바로 용왕기도처와 직결되는 곳이고 공통점은 기운이 뭉쳐진 바위산 끝자락에 암자가 자리 잡고 있으며, 탁 트인 바다를 내려보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이야 다리가 건설되고 교통이 발달해 전국 어느 지역이든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과거 조선시대만 해도 사는 곳을 떠나 여행을 간다는 것은 도전하기 힘들었던 시대이고 하물며 섬으로 기도하러 간다는 것은 간절한 염원이 없고서는 실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기도를 하러 머나먼 섬에 가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도하는 바의 절반은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이 4곳의 사찰에 가면 자식을 위해, 가족 건강을 위해, 사업 성공을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부모님들과 불자들을 볼 수 있다.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강화도 보문사는 서울에서 차로 가면 2시간 내외 걸리는 거리에 있는 사찰이다. 예전에는 보문사가 있는 석모도 섬에는 다리가 없어서 배를 타고 왕래해야 했지만 지금은 석모대교로 섬과 이어져서 차를 타고 가 볼 수 있는 사찰이 되었다.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635년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이곳 낙가산에서 절을 창건하였다. 일주문을 통과하여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있어서 가파르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경내에 도착할 수 있다. 보문사에서 반드시 관람해야 할 곳은 눈썹바위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마애석불좌상이다. '마애석불좌상'은 보문사 뒤쪽 계단을 올라가면 있는데 눈썹처럼 뛰어나온 바위 절벽 밑에 조성한 마애불(麻崖佛)로,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승려인 이화응(李華應)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裵善周)와 함께 조각한 것이라고 하는데, 높이 9.2m, 폭 3.3m의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석불좌상은 보관(寶冠)을 쓰고 연꽃 받침 위에 가부좌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다. 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어 더욱 신비감을 자아내는데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불임(不姙) 여성들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마애관음보살상에 기도를 드리고 바로 뒤를 바라보면 아름다운 서해 앞바다를 볼 수가 있어서 어떤 기도도 들어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광경이 든다.

 

<보문사 마애석불관음보살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또한 보문사에는 넓이가 97평에 달하는 천연 동굴 석실이 있으며, 석실 안에 봉안된 세 분의 삼존상과 한 분의 관세음보살상, 19분의 나한상은 보문사의 대표적 성보문화재로 알려져 있다. 이 석실은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석굴사원이기도 하다. 석굴사원의 예는 경주 석굴암,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강원도 속초의 개조암 정도로 우리나라에 몇 되지 않는 귀중한 예이다. 이 석실의 역사는 보문사 창건 역사와 거의 일치하며 일화에 따르면 635년(신라 선덕여왕 4) 4월,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올라왔다고 한다. 실망한 어부는 돌더이들을 바다에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돌덩이가 올라왔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버렸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더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하라고 하였다. 다음 날 다시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 준대로 낙가산(落迦山)으로 옮겼는데,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어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생각하고 굴 안에 단(檀)을 쌓고 모셨다고 한다. 

 

<보문사 석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기도를 드리고 나면 보문사 바로 앞에 석모도 미네랄 온천이 있다. 예전에 석모도 온천의 경우 용궁 온천이라고 해서 동네 사람들이 만든 허름한 노천 온천이었는데, 이후 시설이 좋은 해수 온천으로 개발이 되고 석모대교가 개통을 하면서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코로나19 전에는 온천을 이용하는 관광객과 사찰을 방문하고 들리는 사람들로 혼잡해 한정된 인원만 입장이 가능해서 아침 일찍이 아니면 보통 2~3시간 대기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다. 노천 온천탕에서 서해를 바라보며 하는 온천욕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하루의 피곤을 푸는데 적당하다.

 


여수 돌산도 향일암(向日庵)

 

여수 향일은 이제 서울에서도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사찰이 되었다. 문명의 혜택으로 말미암아 교통이 발달하여 KTX를 이용해서 새벽에 출발하면 향일암은 물로 가까운 주변 명소도 들려보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 정도이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방문하기가 수월해졌다.

매표소에 도착해서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면 향일암 사찰 입구에 들어가기 전 가장 먼저 등용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용문은 중국 황하 상류 협곡의 이름인데, 물살이 매우 급하여 힘센 큰 물고기도 여기에 오르기 어려우나 한번 오르기만 하면 물고기가 용으로 승천한다는 전설이 있다.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입신출세의 길에 오르게 되는 것을 등용문(登龍門)이라고 하며, 향일암 입구에 등용문을 조성한 것은 이곳을 오르는 모든 이들이 세상의 난관을 극복하고 승승장구하여 용이 될 수 있도록 기원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여수 향일암(向日庵)은 기도 발원을 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영원한 해수관음 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향일암은 근대에 이르러 절 뒷산의 바위가 거북 등처럼 생겼다 하여 영구암(靈龜庵)으로 부르기도 했다가 해 뜨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여 다시 향일암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풍수가에 따르면 거북이가 바다 쪽으로 팔을 휘저으며 들어가고 있는 형국의 혈터라고 한다. 지세가 그러하니 거북 등에 쇠붙이를 얹거나 등에 구멍을 뚫으면 큰 재앙이 내린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언젠가부터 향일암의 크고 작은 영험담이 떠돌자 불자들이 몰려들었고, 주지 스님은 순례객을 맞기 위한 방편으로 철재 난간을 만들어 철주를 박고 울타리를 쳤다. 그런데 지하수를 파기 위해 땅을 뚫던 굴착기가 망가지고 주지 스님의 건강이 나빠지는 등 이상 징후들이 잇따르면서 놀란 스님들이 철책을 제거하고 샘을 매몰하자, 주지 스님도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

 

<향일암,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향일암은 644년(백제 의자왕 4)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원통암이라고 불렀으며 고려 관종 9년에는 윤필 거사가 금오암으로 개명을 하고 조선 숙종 41년인 1715년 인묵 대사가 향일암(向日庵)이라고 바꿔서 지금까지 부르고 있으며, 향일암이라는 뜻은 '해를 향하는 암자'라는 뜻이다. 새해 향일암에서의 해맞이는 모든 선과 복을 불러일으키고 원하는 것을 모두 성취시키는 힘이 있다고 한다. 향일, 태양을 향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단순히 물리적인 태양을 바라본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향일은 태양과 같은 부처님을 향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데 왜 향일암은 관음도량이 되었을까. 『불설 법집경』에 관세음보살이 부처님께 아뢰길 "새존이시여, 보살은 반드시 많은 법을 닦고 배우지 않습니다. 비유하면 해가 솟아 온갖 물건을 밝게 비추어 중생이 하는 일을 모두 성취하게 되는 것처럼, 저도 또한 이와 같아서 어느 곳에서든지 대자비의 해가 세간을 비추는 것에 따라 저곳의 중생이 관세음보살에 의지하여 깨달음에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향일암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이 늘 상주하는 절이란 의미이다.

 

<향일암 해탈문>

 

향일암에서는 다른 절과 다르게 바위틈이 해탈문 역할에 해당한다. 해탈문을 나타내는 바위틈을 통과하여 사찰에 들어서는 순간 해탈에 이르는 경지에 다다르게 됨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통과하면 좋다. 해탈문을 빠져나와서 경사진 계단을 오르면 번뇌와 집착을 버린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바로 향일암의 금당인 원통보전이 나온다. 150m의 급경사 절벽에 세워진 원통보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내가 망망대해를 안은 것 같은 위용이 드러난다. 원통보전에는 주존 석가모니불과 협시로 관음, 지장보살을 모셨다. 관음전 가는 길은 대낮에도 전등을 켜야 할 정도로 좁고 어두운 석문을 지나야 한다. 빛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듯이 부처님의 지혜 광명이 없었다면 어리석은 중생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석문들이다. 관음전에는 설법인의 관세음봅살을 독존으로 모셨다. 후불화와 벽화에는 관세음보살이 향일암 바닷가의 깎아지른 높은 절벽 바위에 편안히 앉아 모든 중생들의 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이다. 만약 관세음보살이 바쁜 모습이라면 중생들은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벽화에는 관세음보살이 청룡을 타고 감로수 병과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중생의 기도에 응답하는 모습이다. 감로수 병은 중생의 욕망으로 인해 생긴 괴로움을 치유하고 버드나무 가지는 중생의 질병으로 생긴 병을 치료해 준다.

 

<향일암 석조해수관음상>

 

향일암에 갔다면 관음전은 반드시 들려 보기 바라며, 옛날 사람들은 바다 밑에 용궁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누군가는 가장 기도를 잘 받는 곳이 석조해수관음상이라고 해서 다시 한번 여수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드렸으며, 방문하게 된다면 저 앞바다속 밑 어딘가에 소원을 들어주는 바닷속 용궁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소원을 빌기를 바란다.

 

낙산사 홍련암과 남해도 보리암은 다음 사찰 기행 편에....


 

[1] 철학이나 종교 따위에서, 서로 다른 학설이나 교리를 알맞게 조화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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