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5일에 양양에서 일어난 큰 산불로 낙산사의 대규모 전각이 소실되었다. 당시 산불이 얼마나 심했는지, 이전부터 낙산사 주변에서 물을 뿌리며 확산을 막던 소방헬기들도 다른 곳의 불을 끄느라 도저히 낙산사로 올 수 없었고 그나마 온 소방차가 오히려 불에 탈 정도였다고 한다. 낙산사의 승려와 신도들이 소화기로 불을 꺼보려 했지만 고작 소화기 따위로 이 큰 산불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낙산사 화재 당시 홍련암 앞까지 불길이 번졌지만 홍련암은 이를 가까스로 피해 화재 이전부터 볼 수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금의 홍련암을 볼 수 있다. 이후 낙산사가 가장 번성하였던 조선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이 났고,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하여 복원불사에 착수 2007년 4월 5일 복원이 완료되었고 지금의 낙산사로 재탄생되었다.
낙산사 홍련암(紅蓮庵)
이른 새벽 동해바다가 갑자기 보고 싶어 가본 적이 있는가. 동해 바다를 가더라도 마음의 위안이 되는 곳이 있었는가. 나에게는 낙산사가 바로 그 사찰이다. 이른 새벽 고즈넉한 시간에 사찰 입구를 통과하면 홍련암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이 있다. 그 길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새벽부터 고기잡으로 가는 어선들이 동해를 힘차게 깨우고 있으며,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이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잡념을 불태워 버려 사그라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671년 창건하였다.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이 항상 머무르고 설법하고 계신다는 보타낙가산의 '낙산'에서 유래 되었으며 오랜 시간 역사를 이어오면서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을 친견하려는 수많은 기도 불자들과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풍광과 함께 동해에서 해돋이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관동팔경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낙산 동쪽 바닷가 굴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견하기 위해서 찾아갔다. 굴 입구에서 7일 동안 재계하고 좌구(座具)를 새벽물 위에 띄우자 용중(龍衆)과 천중(天衆) 등 8부 신장이 굴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배드려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받아서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다시 바쳤다. 의상은 이들을 가지고 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하여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이 이르기를 "좌상(座上)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였다. 의상은 그곳에 금당(金堂:법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신 뒤 절 이름을 낙산사로 하였다. 그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에 모셨다.
창건 이후 원효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 절을 찾았는데, 남쪽 교외에 이르러 흰옷 입은 여인이 벼를 베자 원효가 장난 삼아 벼를 달라하니 여인은 벼가 익지 않았다고 답했다. 원효가 다시 길을 가다 다리 아래서 월경 수건을 빨래하는 여인에게 물을 달라구 청하니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그 물을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하기를, "불성을 깨닫지 못한 중리로다!" 하고는 사라졌다. 소나무 아래엔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원효대사가 낙산사에 이르러보니 관음보살상 자리 아래에 아까 보았던 신발 짝이 있었다. 그제야 앞서 만났던 여인들이 관음의 진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낙산사에 가서도 풍랑이 심해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의 궁전 원통보전 앞에 이르면 화마의 뜨거움도 견뎌낸 칠 층 석탑이 우뚝 서있다. 세조 13년(1467)에 세워진 석탑으로 강릉 심복사 석탑 양식을 계승한 탑이다. 깨어진 칠 증 석탑을 바라보면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긴 홍길동전의 주인공 허균이 생각난다. 강릉이 고향인 그는 20대 후반 약 3년을 낙산사에서 지내기도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신분은 태어날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자신의 행동에 따라 귀천이 나누어진다."라고 말씀하셨다.
허균의 넓은 학식과 뛰어난 문장은 불교의 자비와 평등사상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사대부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모든 것은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그의 불교적인 인생관은 급기야 『홍길동전』을 낳았고,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꿔왔다. 허균은 삼척부사로 재직할 당시, 참선과 예불을 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그는 파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문파관작(聞罷官作)'이라는 시를 지어 당당히 자신의 소회를 드러냈다.
"유교가 어찌 나의 자유를 구속하랴
세상살이 다만 내 뜻에 따를 뿐
그대는 모름지기 그대의 법을 사용하라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살리라"
참으로 불교적인 시다. 이제는 낙산사의 주인공인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할 차례다. 전각 이름이 원통보전이다. 관세음보살은 듣는 것이 어느 보살보다도 뛰어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청각이 원통자제하다고 해서 원통교주, 원통대사라 한다. 관세음보살님의 청각은 아마 세계 최대의 우주 안테나인 골드스톤의 100만 배가 넘을 것이다. 그만큼 중생의 소리를 듣고 해결하는 최고의 권위자로 중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이다.
원통보전의 관세음보살은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 전해진다. 모습은 두툼한 얼굴에 서린 기품과 나무랄 데 없이 균형 잡힌 비례감각, 전신을 휘감은 세련되 영락장식, 늘어뜨린 유려한 의복, 화려하고 섬세하게 꾸며진 보관 등 고려후기의 전통양식을 계승한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이다. 조선시대 남효온은 금강산 가는 길에 낙산사를 참배하고 "관음전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의 모습은 극히 정밀하고 교묘하여 마치 영혼이 들어 있는 듯하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이어서 봐야 할 곳이 홍련암이다. 홍련암은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바다 절벽 위에 지었으며 관음보살이 홍련 위에 앉았기에 홍련암이다. 홍련암 법당 마루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 지금도 관음굴 입구를 볼 수 있다. 설화에서 그친 거이 아닌 현실로 입증하는 우리나라 제1관음성지이다. 이른 아침 동틀 무렵부터 낙산사 경내를 배회하며 홍련암에 이르렀는데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제1관음성지답게 관세음보살에게 새벽부터 기도를 드리기 위해 많은 불자들이 암자안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며 동해의 떠오르는 일출과 더불어 엄숙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홍련암은 낙산사에서도 변두리 해변가 바위절벽에 위치에 있어서 예전에 불교와 사찰에 관심이 없었던 시절 한 여름에 방문했을 때는 너무 더워서 반드시 가봐야 할 홍련암은 보지 않고 원통보전 등 주변 전각과 거대한 해수관음보살만 보고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혹시 못 보신 분들은 다시 한번 낙산사를 방문하게 된다면 우리나라 관음성지中 하나인 홍련암을 반드시 방문해서 세상살이가 지치거나 힘들 때 "나무관세음보살" 기도를 올려보시기를 바란다. 혹시 관음보살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을까!
남해도 보리암(菩提庵)
남해 금산, 한국 최고위 기도처로 꼽힌다. 한국의 3대 기도처라 하면 남해 금산 보리암,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낙가산 보문암이다. 여수 향일암을 포함해 4대 기도처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으뜸 기도처가 남해 금산 보리암이다. 이들은 모두 해수관음 기도 도량이다. 산신 기도처로서는 설악산 봉정암과 팔공산 갓바위 기도처를 으뜸으로 꼽는다. 때로는 영축산 통도사 자장암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산신 기도처와 해수관음 기도처를 총 망라해서 꼽는 한국 최고의 기도처는 금산 보리암과 설악산 봉정암, 팔공산 갓바위라 한다. 해수관음이든 산신 기도처든 금산 보리암은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기도처인 셈이다.
사실 남해 금산은 전통적으로 명산은 아니었다. 현대 들어서까지 명산으로 꼽히는 전국의 산들은 통일신라가 일찌감치 전국의 명산ㆍ대천을 삼산오악과 대사ㆍ중사ㆍ소사로 선정한 산에 모두 포함된다. 남해 금산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최초의 역사적 기록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온 전국의 산천제나 천제를 지냈던 명산 30여 곳은 금산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포함되지 않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뚜렷한 이유는 아마 당시까지 육지에서 접근성이 매우 떨어졌던 섬이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남해'란 지명은 신라 신문왕 시절 행정구역 개편으로 첫 등장한다. 금산 절경의 진가를 서서히 알일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고려시대까지 역사서나 관련 문헌에 금산에 대한 기록은 여전히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 들어서부터 남해와 금산 관련 기록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금산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까? 분명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계기는 조선 건국과 관련한 이성계와 금산 산신의 얽힌 이야기 때문이다. 왕과 관련된 내용이 전해지자 금산을 찾는 선비들이 부쩍 많아졌다. 금산에 대한 선비들의 유람록도 매우 많이 등장한다. 경승 자체가 뛰어난 데다 이성계의 건국에 얽힌 산신과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이 절대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소금강 또는 남해금강이라 불리는 삼남 제일의 명산, 금산(704m)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온통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유일한 산악 공원이다. 신라 원효대사가 이 산에 보광사를 짓고 보광산이이라 불러왔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젊은 시절 이 산에서 백일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하게 되자 영세불망의 영산이라 하여 온 산을 비단으로 두르다는 뜻으로 금산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정상에는 보리암이 있으며, 바다에서 솟구쳐 오르는 금산의 일출은 3년 동안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한다.
보리암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대표적인 성지 가운데 하나다. 『법화경』과 『화엄경』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은 법신불의 대행자 역할을 하는 대자대비의 상징이다. 모든 중생의 고통을 직관하여 구제해 준다. 십일면관세음보살, 천수천안관세음보살 등의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어 고통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보인다. 아미타불과 함께 가장 친근한 보살이다.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관음 신앙이 전래된 이후 통일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수많은 영험담과 설화가 이어져 왔다. 남해 보림암은 특히 해수관음 신앙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리암에는 두 가지 창건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하나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황비인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의 삼촌 장유 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신라의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서기 683년(신라 신문왕)에 원효 대사가 풀집을 짓고 수도하던 중, 희뿌연 광채를 뿜으며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감동으로 보리암을 창건했으며, 『화엄경』에서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광궁에 착안하여 산이름을 보광산으로 짓고 관세음의 별칭인 보문(普門)에서 '보'를 따와 절 이름을 보광사라고 하였다.
남해 보리암의 대표적인 상징물은 관세음보살이 봉안된 보광전과 해수관음상, 그리고 3층 석탑이다. 보광전은 663년(신라 문무왕)에 처음 세워졌다. 주불인 관세음보살과 남순동자, 해상용왕이 좌우 협시로 봉안되어 있다. 관세음보살과 보리암 3층 석탑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후인 허 황후가 인도에서 올 때 함께 싣고 왔다고 하지만 신빙성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삼층석탑은 신라석탑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신라 석탑이라 부르고 있으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감정되고 있으며, 1974년 2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보리암은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성계하고도 인연이 있는 사찰이다. 새로운 왕조를 꿈꾼 이성계는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했지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계룡산과 지리산에서 조차 듣지 못한 답을 바로 이곳 보리암에서 얻고, 나중에 자신이 왕이 되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드리우겠다는 서약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왕위에 올랐어도 그만한 넓이의 비단을 구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누군가의 조언에 따라 산 이름을 비단 '금'자를 써서 '금산(錦山)'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1660년 현종은 보문사를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이름마저 보리암으로 개액하였다.
보리암은 구경할 거리가 많지만 그래도 방문한 이상 반듯이 해야 할 일은 한국 최고의 기도처에서 기도하는 일이다. 보리암에서 가장 명당자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해수관음상이 서 있는 자리라고 한다. 이와 반면 해수관음상 바로 앞에 삼층 석탑이 있는 곳은 기가 제일 센 곳이다. 가장 센 기를 받고 난 후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원을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면 다 들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보문사와 향일암, 간절하게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해수관음도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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