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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순천(조계산) 선암사, 사찰 역사와 불교 문화유산 소개(55)-보물편 1

by 3000포석정 2023.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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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람료' 무료 기념해서 특집으로 전국 65개 사찰들에 대해 사찰의 역사와 해당 사찰에 어떠한 문화유산(국보와 보물)이 있는지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암사 역사와 유래

백제성왕 5년인(527년)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阿度和尙)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이창주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으며, 지금도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지고 있다.

 

삼창주 의천대각국사께서 대각암에 주석하시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대각국사께서는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셨고 선암사는 호남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당시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 소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김극기(1171-1197)의 시에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전기의 선암사의 기록은 중종 35년(1540년)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때에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탁,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전한다. 1660년에 경준(敬浚), 경잠(敬岑), 문정(文正) 세분의 대사에 의하여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괄목할 중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쟁이전의 상태를 복구하는데는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신 분은 호암약휴(護巖若休)스님이었다. 호암스님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워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중창이후 법당 8, 전사(殿舍) 12, 중료(中寮) 16, 산암 13, 부속암자로 선적암(善積菴), 도선암(道詵菴) 등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 35년(1759년) 봄에 선암사는 또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상월새봉(霜月璽封)스님과 서악(西岳)스님이 다음해인 1760년에 재건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는 아도화상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五創)이라 할 수 있다.

 

정조 13(1789)년에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이 대각암에서 100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임금이 태어났다. 이후 왕위에 오른 순조임금은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하였다.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 여수, 광주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재 선암사는 태고종 유일의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으로써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종합수도도량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선암사 문화유산

종목 명칭 시대명
보물 순천 선암사 동ㆍ서 삼층석탑 통일신라
보물 순천 선암사 승선교 조선시대
보물 순천 선암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보물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조선시대
보물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고려시대
보물 순천 선암사 북 승탑 고려시대
보물 순천 선암사 동 승탑 고려시대
보물 순천 선암사 대웅전 조선시대
보물 선암사 석가모니불 괘불탱 및 부속 유물 일괄 조선시대

<선암사 동ㆍ서 삼층석탑(좌)과 선암사 승선교(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동ㆍ서 삼층석탑

선암사는 신라의 아도화상이 개창하여 비로암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헌강왕 때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더 믿을 만하다.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이나 되고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여, 이 때문에 '선암(仙岩)'이라는 절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절 안의 승선교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좌우로 3층석탑 2기가 서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탑은 완전히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규율성이 느껴진다. 위와 아래의 비율도 건실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승선교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보성 벌교 홍교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부도 :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 승탑ㆍ사리탑을 나타냄

 

<선암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좌)와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전라남도전라남도 승주군에 있는 선암사삼층석탑(보물)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유물 3점이다. 동탑 1층의 하부에서 사리 구멍이 발견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사리 구멍에서 나온 유물은 사리 장엄구로 청자 항아리, 백자 항아리가 각각 1점씩 있었으며, 사리 장치는 백자 항아리에서 나왔다. 이 백자 항아리 안에 비단으로 싼 금동 사리탑이 있고, 사리탑 안에 회백색 타원형의 사리 1개가 있는데, 사리는 팔각 원통 모양의 수정 그릇 안에 있다.

금동사리탑은 높이 6.2㎝, 폭 1.9㎝의 크기이다. 사리가 모셔진 팔각 원통 모양의 이 사리탑은 백자 항아리 안에서 발견되었다. 3겹의 꽃잎이 위로 벌어진 연좌 위에 탑의 몸체와 지붕돌을 갖추었다. 사리탑은 14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말의 사리장치 연구는 물론 당시의 금속공예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대각국사 의천 진영

고려시대 승려인 의천의 초상화이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천태종을 열어 불교를 통합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 영정은 가로 110.2㎝, 세로 144㎝ 크기의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것으로, 의자에 앉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왼손은 긴 막대를 잡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단주(短珠)를 팔목에 끼고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다. 사색에 잠긴 듯한 눈빛과 넓은 이마, 큰 코와 귀 그리고 꼭 다문 입에서 그의 학식과 수행자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녹색의 가사를 걸쳤으며 금빛의 둥근 고리로 매듭을 대신하였다.

이 영정은 승려화가인 도일비구(道日比丘)에 의해 순조 5년(1805) 수정ㆍ보완된 것으로, 앞 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알 수 있는 당대의 대표작이며, 혜근(惠勤)의 글이 있어 더욱 가치가 있다. 습기로 인한 얼룩이 있고 일부 굴곡진 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선암사 대각암 승탑(좌), 북 승탑(중앙), 동 승탑(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대각암 승탑

이 승탑은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에 딸린 암자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대각암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전형적인 8각 승탑으로,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위에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어 놓았다. 조각수법과 지붕돌 형태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북 승탑

승탑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승탑은 선암사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400m 지나 한적한 산중턱의 선조암이라는 암자에 세워져 있다.

이 승탑은 사자상, 구름모양, 연꽃, 인왕상 등을 새긴 조각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 승탑

승탑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선암사 무우전 뒷편의 능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약 200m 올라가면 이 승탑이 보이는데, 사찰 안에 있는 3기의 고려시대 승탑 중 하나로, 규모가 크고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다.

통일신라시대의 8각 승탑 양식을 착실하게 따르고 있는 작품으로, 각 부분의 만든 솜씨들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순천 선암사 대웅전(좌)과 석가모니 괘불탱(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대웅전

대웅전은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져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영조 42년(1766)에 다시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순천 선암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앞면 3칸ㆍ옆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선암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학술적ㆍ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석가모니 괘불탱

선암사석가모니괘불탱은 본존불만을 단독으로 등장시켜 간단한 구성을 보여주는 독존도(獨尊圖) 형식의 괘불화이다. 중앙에 홍련좌(紅蓮座)를 딛고 서 있는 입불상을 화면에 가득 차도록 큼직하게 그린 다음 상단 좌측(向右)에는 구슬장식이 화려한 금색 탑안에 사자좌를 한 '다보불(多寶佛)'추정의 불상이 앉아 있고, 밖에는 부처를 향해 합장한 보살상(대요설보살로 추정)이 배치되어있는 장면을 나타내었다. 이와 대칭하여 자리한 오른쪽(向左)에는 사자좌에 앉아 각자 손 모양을 달리하고 있는 '시방불(十方佛)'을 묘사하였다.

선암사 괘불탱은 조성연대가 명확하여 화원인 '쾌윤(快允)' 작품의 초기 경향과 함께 조선시대 18세기 중엽 경 불화 화단의 흐름을 살피는데 자료적 가치가 있음은 물론, 알맞은 신체 비례에 유려하면서도 정밀한 필치로 이목구비와 손ㆍ발을 묘사하고 꽃무늬들을 나타냄으로써 세련미가 돋보이는 등 조형성 또한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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