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조 왕의 삶과 통치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지니고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햄릿에 비견될 만큼 비극적인 이야기이고, 정조 시대의 문화 융성과 수원 화성 등과 같은 건축의 발전은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만큼 찬란하게 발전하였고, 정조의 영특함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만큼 크고 위대했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
장조의황제(재세 : 1735년 음력 1월 21일~1762년 음력 윤 5월 21일)는 영조와 영빈 이 씨의 아들로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 1736년(영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에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그를 경계하는 노론 벽파 대신들이 왕세자를 모함하여 영조와 왕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되었다. 특히 1762년(영조 38)에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왕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왕세자가 명을 따르지 않자 영조는 왕세자를 폐서인 한 후 뒤주에 가두었다. 『영조실록』 1762년(영조 38) 5월 13일의 기사에는 아버지인 영조가 왕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나경언이 고변한 후로부터 임금은 왕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하였다. 임금은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에게 휘령전(정성왕후의 혼전)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 배례를 마치자, 궁성문을 굳게 막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 후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왕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세손(정조)이 들어와 관과 포를 벗고 왕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전교를 내려 왕세자의 자결을 재촉하니, 왕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은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군병을 시켜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림 임덕제 마저 강제로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왕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 이냐? 하고, 전문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 가를 물었다. 왕세자는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드디어 왕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왕세자빈, 세손 및 여러 왕손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결국 뒤주에 가둔지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다.
<출처: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융릉의 역사
1762년(영조 38)에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묘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며,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에 헌경의황후(혜경궁) 홍 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하였다.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용주사의 건립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과 그리움으로 마음 아파하던 정조가 보경 스님의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묘소의 이장과 용주사 건립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자에서 폐위되어 뒤주에 갇혀 죽고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초라하게 묻혀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수은묘)을 화산 현륭원 (현재 융릉)에 옮긴 뒤 넋을 기리며 무덤을 돌볼 사찰로 용주사를 지었기에 '효행대본찰(孝行大本刹)'로 불리는 것이다. 다른 사찰들처럼 불교계나 스님이 아닌 유교국가 조선의 국왕의 명으로 지은 원찰(願刹)이다. 사찰의 낙성식 전날 밤,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용주(龍珠), 란 용이 입에 문 여의주인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길상을 현몽한 정조가 붙인 이름으로 아버지 사도세자 가 이제야 한을 풀고 승천한 것이라고 믿고 '용주사'란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용주사 자리는 과거 신라 문성왕 16년(854년) 때 세워졌던 갈양사(葛陽寺)가 불타 터만 남은 곳에 정조가 1790년(정조 14) 부친인 '사도장헌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딸린 원찰로 삼기로 하고 지금의 용주사를 세웠다.
*원찰(願刹)은 선왕(先王)을 추모하고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사찰로, 능침사(陵寢寺)라 고도한다. 능 인근의 사찰이 원찰로 지정되면
고인의 명목을 비는 제사와 능을 지키는 역할을 했고, 국가로부터
노비, 곡식 등이 지원됐다(불교신문, 2009.7.4)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願刹)인 용주사는 사도 세자(융릉)와 정조대왕(건릉)의
위패를 모신 능침사찰이다. 용주사는 능(陵)이나 원(園)에 딸려서 제사 물자를
조달하는 조포사(造泡寺)의 역할을 했다.
사찰은 국보로 지정된 범종과 보물인 대웅전의 유서가 깊고 정조대왕과 그의 부친 사도세자의 위패와 신위를 모시고 있다. 특히 아버지 영조에게서 미움을 받아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아버지의 원혼을 풀고 효를 다하기 위해 용주사에서 가까운 곳에 현륭원으로 사도세자를 모시고 수시로 능행을 왔으며, 자신도 아버지의 무덤 융릉 옆인 건릉에 묻혔다. 사도세자는 나중에 고종 때 장조로 추존왕이 되었으며 두 개 왕릉의 관리를 용주사가 맡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용주사에는 일반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첫째, 홍살문이 용주사 입구에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홍살문은 왕릉, 묘, 향교, 관청 등의 입구에 세우는 것인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고종 때 추존왕 장조가 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호성전에 사도세자와 부인의 위패를 모셨고 후에 정조와 왕후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으로 지나도록 격을 높여 홍살문을 설치했다. 홍살문은 궁전과 관아, 능과 묘, 혹은 향교 앞에 세우던 문이다. 안내판에는 '홍살문이 없어진지 100년을 기념하여 2008년에 복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용주사의 입장에서는 홍살문 덕분에 불교를 핍박하던 선비들의 행패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둘째, 삼문과 돌길, 그리고 목조기둥 아래에 있는 석조기둥도 용주삼만이 지닌 궁궐양식이다.
좌우 행랑 7칸인 문으로, 문이 3개가 있다고 해서 삼문으로 부르고 돌길 역시 다른 절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마치 궁궐에 있는 어도를 연상케 한다. 천보루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볼 수 있는 목조기둥 아래에 석조기둥을 받친 전형적인 궁궐양식 건축물이다.
삼문을 통과하여 대웅보전으로 올라가기 전 높은 돌계단으로 지나 올라가야 하는 천보루는 1790년 용주사 창건 당시 지어진 것으로 규모 면에서 웅장한 경기도 문화재 36호이다. 중정에 있는 '세존사리탑'이라고 하는 '천보루 앞 오 층 석탑'은 조선 숙종 28년(1720년) 고승 성정(成淨)이 부처님의 진시나리 2 과를 감로병에 담아서 보관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제작시기는 알려지지 않으며 조선시대 탑으로 보고 있다.
보물 1942호인 대웅보전은 규모나 보존 상태, 특히 지붕면의 공포, 단청, 정교한 용 등의 조각 모양 등이 놀랍다. 대웅보전은 외부만이 아니라 닫집 등 내부의 장식도 아름다워서 18세기의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황금색으로 쓴 대웅보전 현판의 글씨는 정조 임금의 친필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웅보전에는 목조삼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삼세불 좌상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고 왼쪽이 아미타여래불 오른쪽에 약사여래불이 협시하고 있다.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에 '자궁저하 수만세(慈宮邸下 壽萬歲)라는 글귀는 정조 임금 효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자궁이란 임금의 어머니를 뜻하고, '자궁저하 수만세'는 임금님의 어머니께선 만수무강하십시오'라는 뜻이 된다. 정조는 용주사를 통해서 죽은 아버지의 명복과 살아계신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동시에 빌었던 것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214호로 지정된 삼세불좌상의 뒷면에 봉안된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조선 중기 최고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구전되어 온다. <출처ㅣ경기문화재연구원>
대웅보전의 오른쪽 호성전에 정조와 그의 부친 사도 장헌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종묘 이외의 장소에서 왕의 위패를 모시는 것은 왕과 특이한 인연과 의지를 반영한다. 용주사에는 '사도 장헌세자(장조의 황제)' 부인(혜경궁홍씨 헌경황후)과 아들 정조황제와 효의황후의 위패를 모시는 호성전이 있다. 이곳은 죽은 신도들의 사진과 이름을 새긴 작은 불상이 온 벽면에 빼곡하게 모셔져 있다.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 위패를 모시기 때문이다.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은 칠성과 산신, 독성이 탱화로 모셔진 곳으로 시방칠등각은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킨 모습이다.
용주사는 다수의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를 다수 보유한 유서 깊은 절이다. 천불전 좌측 전면의 범종각에는 국보 제120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동종이 있다. 종의 머리 부분에는 신라시대의 종에서 보이는 용뉴와 용통이 있다. 범종은 신라의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삼존불과 비천상이 아름답게 조각된 걸작이다. 우리나라에 국보로 지정된 동종은 4개가 있다. 첫째는 선덕여왕신종(국보 제29호), 둘째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셋째가 용주사 동종이며, 네 번째는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천황사지 동종(국보 제280호)이다.
삼문을 나와 오른쪽을 보면 사도세자를 그리워한 정조의 효심을 기려서 '효행박물관'이라는 전각이 있다. 이곳에는 정조가 하사한 『부모은중경』을 비롯하여 보물 제1905호인 봉림사 아미타불 복장유물, 김홍도가 그린 사곡병풍 외 다수의 귀중한 유물이 소장되어 있는데, 방문 당시에는 문이 잠겨져 있어서 관람할 수는 없었다.
효행박물관 우측에는 '부모은중경'탑이 있고 삼문을 나서 왼쪽 담장 아페는 '혜경궁 읍혈록 문학비'가 있다. '사도장헌세자'의 부인으로서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막지도 못하고 통한의 삶을 살아야 했던 혜경궁홍씨 (현경왕후)까 81세로 죽을 때까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한중록(읍혈록)을 발췌해 "혜경궁 읍혈록 문학비"를 경내에 거대한 화강석 돌에 새긴 비를 2010년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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