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기원
산문(山門)을 통과하여 사찰 경내에 진입하게 되면 가장 먼저 사찰의 중앙에 위치한 탑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찰을 방문하게 되면 탑보다는 불전(佛殿)을 먼저 방문하고, 탑을 불교신앙의 대상이 아닌 오래된 역사적 문화 유물로서 그저 바라볼 뿐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불교 신앙으로서의 탑의 본질적 가치를 알고 있지는 못한다.
탑이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의 '스투파(stupa)' 또는 팔리어인 '투파(thupa)'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인데 원래 '무덤'이란 뜻이다. 많은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고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다비[1]했더니 수많은 신골(身骨)과 사리[2]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때 제자들이 부처님 사리를 서로 더 많이 가져가 탑을 세우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가서 8기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불경에 전해오는 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전해오는 말에는 나중에 도착한 두 제자가 다비한 재를 가져가 탑을 세워 처음에는 10기의 탑이 있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이러한 최초의 탑을 '근본팔탑(根本八塔)' 또는 '근본십탑(根本十塔)'이라 부록 있다. 이때부터 탑은 탑을 부처님의 무덤으로 여기는 신도들에 의해 생전의 부처님을 대신하는 숭배의 대상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당시에는 탑만이 부처님과 동등한 숭배의 대상이었고, 사원의 공간 배치에서도 탑이 항상 중심부를 차지했다. 이러한 시기는 불상이 등장하기까지 약 5백 년이나 지속되었다. 탑은 초기불교에 있어서 신앙대상의 중심이 되었으나 제한된 사리 수와 유물, 유품의 한계로 탑의 건립이 어려워지자 예배의 대상으로 불상이 조성되었고, 그 불상으로 신앙대상의 중심이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탑은 부처님의 진신에 귀의하는 신앙의 핵심 대상물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후 불교가 여러 지역으로 전파됨에 따라 나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한 사리탑 이외에도 경전이나 기타 성스러운 물건들을 모신 탑들이 많이 세워져 예배의 대상이 되었고 지역에 따라 그 양식에도 약간씩의 변화를 보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탑은 그저 단순한 장엄물이 아니라 부처님과 동등한 신앙과 예배의 대상임을 명심해야 하며, 탑에 대한 예배는 먼저 탑을 향해 합장반배를 한 다음 합장한 채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고 나서 다시 합장반배를 한다. 특히 시계방향으로 도는 이유는 인도의 전통예법대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가 항상 탑쪽을 향하게 하기 위해서다. 인도에 지금 남은 가장 오래된 탑은 산치대탑으로 마치 그릇을 엎어 놓은 것처럼 둥근 모습을 하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우산모양의 산개(傘蓋)가 있는데, 산개는 인도에서 고귀한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탑의 시대별 형태
탑 문화는 그 후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중국에서는 탑이 그들 고유의 고층 누각건축과 결합하여 목탑과 전탑이 많이 만들어 졌으며, 특히 중국 건축의 핵심인 벽돌로 만들어진 전탑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삼국시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삼국시대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전래된 삼국시대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목탑들이 건설되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고구려의 정릉사지의 팔각 목탑지, 백제의 미륵사지 중앙 목탑지, 신라의 황룡사 구 층 목탑지가 대표적인 삼국시대 탑의 흔적이다. 삼국시대 말기 목탑이나 전탑의 양식을 석탑으로 재현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되는데,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이나 정림사지 오 층 석탑은 목탑을 석탑으로 전환하려 한 대표적인 시도이며, 신라의 분황사지 모전석탑은 전탑 양식을 석탑에 적용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 탑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어 정확한 양식을 파악할 수 없지만, 남아있는 유적을 보면 공통적으로 팔각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백제의 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오 층 석탑이 남아있으며, 그 밖에 일본의 목탑을 보고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4각형의 형태와 하늘로 날아갈 듯한 날렵한 비상미가 특징이다.
통일신라
통일신라에서는 불교가 융성하여 상당히 많은 양의 탑이 조성되었으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우수한 탑들은 대부분 이 시기의 것이다. 특히 통일신라에서는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 완성되었는데, 삼국통일 직후에는 신라의 자신감을 보여주듯이 거대한 석탑들이 조성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이다.
이후 거대한 석탑의 양식을 지키면서도 크기가 작고 아담한 탑들이 만들어지면서 삼층석탑의 전형을 완성시키게 된다. 불국사 석가탑이 바로 완성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층의 높은 기단 위에 층의 탑신을 올려 완만한 상승감을 통해 안전성을 추구하였으며, 기본적으로 목탑을 모방하였으나 미륵사지 탑에 비하여 사용되는 석재의 종류가 훨씬 적어지고 구성도 간단해졌다.
석가탑 이후 시대가 내려가면서 석탑도 여러 가지 변화를 겪게 된다. 기존의 형식을 파괴하는 독특한 탑들이 만들어지는데 이를 이형(異形) 석탑이라고 한다. 딱 봐도 특이한 다보탑, 일층 외에는 탑신석이 없는 정혜사지 십삼 층 석탑이나 층 기단부를 없애고 사자상을 둔 화엄사 사사사 삼층석탑이 대표적이다.
나말여초와 고려
신라 중앙정권의 힘이 약해지고, 각 지방의 유력한 세력이 자체적으로 불사(佛事)를 추진하게 되면서 경주 밖의 지방에서는 특이한 모양의 이형(異形) 석탑과 더불어 각 지방색을 강하게 띄는 탑들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대표적인 이형석탑은 기단을 부처님의 대좌모양으로 만든 철원의 도피안사 삼층석탑이다.
각 지방에서는 독특한 지방색을 지닌 탑들이 만들어졌는데 경상도에서는 신라 양식의 탑들이 계속 만들어졌으나,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계승한 백제양식, 혹은 백제-신라 절충양식의 석탑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한편 강원도에 고구려식을 계승한 탑들이 만들어지는데, 고구려계의 탑은 팔각형의 몸체에 탑신이 구층 이상으로 높게 솟아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탑은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다. 또한 청석(靑石)탑이라고 하여 점판암 재질의 검은 돌로 만든 여러 층의 작은 탑이 유행하기도 하였으며 금산사 육각다층석탑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원간섭기에는 '경천사지 십층석탑'같이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석탑도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삼층과 오층의 석탑이 비슷한 비율로 만들어졌으며, 칠층을 넘는 다층의 탑들도 존재하며, 통일신라보다 유연하고 월등한 상승미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조선시대에는 많은 비용과 노력이 요구되는 석탑의 조성이 많지 않으며, 전반적으로 크기와 높이가 작아 지고 조각도 형식적이다. 다만 조선전기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원각사지 십층석탑', '낙사사 칠층석탑',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등이 만들어지지만,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석탑의 조성 자체가 매우 드물어진다. 이는 불교의 축소와 동시에 건축에서 다듬은 돌을 왕실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게 했던 규제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시대를 구분하는 주요 탑(塔) 소재지>
서울 : 경천사지 십 층 석탑(現 국립중앙박물관), 원각사지 십 층 석탑(탑골공원)
경기 :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 남양주 수종사 팔각 오 층 석탑
강원 :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양양 낙산사 칠 층 석탑
충남 : 부여 정림사지 오 층 석탑
전북 : 익산 미륵사지 석탑,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전남 :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경북 :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경주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죽은 이의 시신을 불에 태워 그 유골을 거두는 불교의 장례 방법
[2]참된 수행의 결과로 생겨난다고 여겨지는 구슬 모양의 유골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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