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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천왕문(天王門), 산문(山門)에 들어서며(2)

by 3000포석정 2023.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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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전에 다가가는 산사의 두 번째 문인 천왕문(天王門)은 일주문을 통과하고 만나는 건축물이다.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 같은 경우 일주문 통과 후 천왕문 없이 바로 불이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찰은 천왕문 대신 금강문이 있기도 한다. 절에 규모에 따라서는 천왕문이 없을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큰 사찰에서는 만나 볼 수 있다. 천왕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본다면 현관과 거실 사이를 막아주는 중문(中門)에 해당된다. 아파트 중문은 현관과 거실사이에서 외풍도 막아주고 먼지도 막아주듯이 천왕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불미스러운 기운을 막아주는 문이다.

 

<양산 통도사 천왕문,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천왕문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받던 귀신들의 왕으로서 지국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증장천왕의 네 분의 천왕을 모셨다하여 사천왕문(四天王門)이라고 부른다. 사천왕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사천왕은 부처님 계시는 수미산 중턱에서 이 세계의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으며, 그분 휘하의 부하들은 천지를 돌아다니며 이 세상의 선악을 모두 살펴서 그 결과를 보고하고 사천왕 자신들은 직접 제석천(帝釋天)[1]에게 보고하는 중대한 일을 맡고 있다. 사천왕 한 분 한 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천왕
지국천왕(持國天王) : 수미산 동쪽을 수호하는 분으로서, 착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내리며 늘 인간을 보살피고 인간들의 국토를 지켜준다 하여 지국천왕이라 한다.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은 허리를 짚고 있거나 손바닥에 보석을 올려놓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광목천왕(廣目天王) : 수미산 서쪽을 수호하는 분으로서, 눈을 부릅뜸으로써 그 위엄으로 나쁜 무리들을 몰아낸다고 해서 광목천왕이라 한다. 광목천왕은 죄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고통을 느끼게 하며 죄인으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고 도심(道心)을 일으키게 한다. 몸은 여러 가지 색깔로 장식되었으며 입을 크게 벌려서 큰 소리와 웅변으로 온갖 나쁜 현상을 물리치고 있다.

증장천왕(增長天王) : 수미산 남쪽을 수호하는 분으로서, 자신의 위엄과 덕으로써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고 있다하여 증장천왕이라 한다. 오른손에는 용을 쥐고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 있으며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다.

다문천왕(多聞天王) : 수미산 북쪽을 지키는 천왕으로서,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며, 부처님 곁을 멀리 떠나지 않고 부처님의 설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듣는다고 해서 다문천왕이라 한다. 그의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이다. 손에는 늘 비파를 들고 있다.

 

지국천황(上좌), 광목천황(우),증장천왕(下좌), 다문천왕(下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우리나라 문헌 기록으로는 1337년에 통도사 천왕문을 건립했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천왕문의 사천왕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임진왜란 이전인 1515년에 조성된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목조사천왕상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사천왕상으로는 유일한 문화재로 당시 다른 전각들은 일본군에 의해 전부 소각되었는데 사천왕상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귀한 유물이다. 아쉬운 점은 사천왕 발아래 깔려 있는 8개의 생령좌(生靈座)[2]가 다 없어지고 하나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사찰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에 사천왕 조각도 두 곳을 빼고 전부 앉아 있는 형식인데 자세히 보면 한쪽 다리들 들고 있다. 중국 사찰도 사천왕 좌상 중에서 한 다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다. 사천왕이 이런 자세를 취하게 된 데에는 전설이 있다.

 

 


사천왕상이 한쪽 다리를 들고 있는 이유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 주원장(朱元嶂, 1328~1398)은 안휘성의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원나라 말기로 국정이 몹시 어리러울 때였다. 17살이 되던 해 심한 가뭄과 메뚜기 떼의 기승, 전염병의 창궐로 부모와 형을 잃은 주원장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 삭발하고 황각사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이 앉아 있는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에 있는 먼지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절도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 결국 절에 온 지 50여 일 후에는 탁발승으로 나서기도 했다. 훗날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된 다음에는 모든 절의 사천왕상을 청소하기 편하게 반드시 한 발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명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조선에서도 사천왕상의 한 다리를 든 모습으로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보통 사천왕상 발 아래에는 야차형 생령좌를 밟고 있는데, 야차형 생령좌는 불교에서는 그냥 나쁜 놈, 악귀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야차형 마구니는 16~17세기에 많이 나타났다면 18세기 초반에 이르면 인간형 생령좌가 많이 등장한다. 아마 조선시대 후반으로 갈수록 탐관오리의 폐해가 늘어났던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중에 재미있는 것은 불국사의 사천왕들은 훈도시를 입은 왜구들을 밟고 있는데, 불국사는 신라 때 지어진 사찰인데도 당시에도 왜구들이 많이 쳐들어왔나 보다. 또 다른 사찰 칠장사(七長寺) 사천왕들은 청나라 군사들을 밟고 있고, 낙산사(洛山寺) 사천왕에서는 지국천왕 발 밑에는 관모를 쓴 관리를 지국천왕이 비파를 타며 발장단으로 지근지근 밟고 있는 모습이 있으며 이런 조형이 나오게 된 배경은 세조와 예종이 하사한 땅을 유생과 관리들이 빼앗으려고 하자 낙산사 스님들은 사천왕께 일러바쳐 탐관오리들을 혼내주려 했던 거 같다. 통도사(通度寺) 사천왕들은 조선 유생을 밟고 계시는데 아마 조선시대 때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으로 인해 사찰과 스님들이 많이 핍박받아서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며 스님들 눈에는 당시 유생들이 악귀였었던 것 같다. 실제로 통도사 천왕문은 조선 후기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혹시 사찰에 가게 된다면 무섭다고 사천왕문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발 밑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낙산사 지국천왕 발 아래 탐관오리(좌), 칠장사 사천왕상 발 아래 청나라 군사(우)>


[1]불교 십이천(十二天)의 하나, 수미산의 꼭대기 도리천(忉利天)의 임금이다. 동방을 지키고 희견성(喜見城)에 살며 사천왕을 통솔한다.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는 하늘의 임금이다.

[2]천인(天人)에서 아귀축생(餓鬼畜生)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을 대좌로 사용한 형식을 생령좌라 한다.


천왕문에 이어 만나볼 수 있는 불이문(不二門)은 다음 블로그 3편 에서.....

산문을 통과하면 제일 먼저 만나는 "불탑(佛塔)"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글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불이문(不二門), 산문(山門)에 들어서며(3)

일주문(一株門), 산문(山門)에 들어서며(1)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탑(塔)의 기원과 시대별 형태

 

 

2023.03.07 - [힐링 사찰 여행] -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탑(塔)의 기원과 시대별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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