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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속리산 법주사, 세조의 몸과 마음을 치유한 사찰 여행(2)

by 3000포석정 202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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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은 정이품송이다. 1464년 조선시대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향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쪽 가지에 걸릴 것 같아 걱정하는 말을 했더니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혀 어가를 무사히 통과시켜 주었다고 해서 세조가 이 소나무에 정2품송 벼슬을 내려 지금까지 쭉 이어져 왔다고 한다. 이 정이품송도 예전에 볼 때는 기품과 기운이 있었으나 이제는 태풍에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갈 때마다 서서히 야위어 가는 모습으로 세월의 무게를 느끼며 사는 것 같다.

 

▣ 법주사와 신미대사

법주사가 있는 속리산은 예로부터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혀 왕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까지 피난 갔다 환궁했던 공미왕도 법주사에 들렸고,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법주사 복천암 극락보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법주사 산 내 암자인 복천암은 세종대왕의 휘하에서 집현전 학자와 한글 학자로 한글 창제의 주역이었던 신미 대사가 주석했던 곳이기도 한다. 신미대사는 1403년~1405년 사이에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김수성(金守省), 본관은 영동(永同) 동생은 유생이면서 숭불을 주장했던 김수온(金守溫)이다. 신미대사는 속리사(현재의 법주사)에 출가하여 사미(沙彌) 시절에 대장경을 읽고 율을 익혔다. 세종은 말년에 왕자 둘과 왕후를 3년 사이에 잃게 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신불(信佛)하였다. 이때 신미와 김수온은 세종을 도와 내원당(內願堂)을 궁 안에 짓고 법요(法要)를 주관하는 등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버지 세종이 내원당을 차려서 밤낮으로 예불을 드렸고 수양대군 시절이었던 당시 세조는 신미대사를 자주 보았으며. 신미대사가 수륙제를 지낼 때, 어머니 소헌황후의 천도재를 지낼 때 등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자주 보았다. 또한 세종이 1443년까지 한글 창제 연구를 10년 동안 할 때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함께 했는데 그때 궁중에 출입하여 법사를 열던 신미는 수양과 안평과의 각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세조는 왕권을 잡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조카인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여 왕이 되었고 조카를 교살하였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핏방울을 뿌려야 했다. 비록 왕권을 잡기는 하였으나 그 악연의 고리는 일생 동안 세조를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 괴롭혔다. 형수이던 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서 침을 뱉자 아들 의경세자가 죽어 나가고, 또한 자신도 평생을 온갖 피부병에 시달리며 죗값을 치르면서 살아야 했다. 이러한 심적인 고통과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세조는 여러 가지 치료를 해 보았지만 차도를 볼 수 없어서 평생을 온천수를 찾아 헤매었고 무엇인가 의지하여야 하였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한 뒤 신미는 주로 복천사에 머물려, 공부와 후학 지도에 전념했다. 신미는 세조를 잘 알았다. 괄괄했지만 불심이 깊었다. 왕위에 오르기 오래 전부터 '불교가 유교보다 나은 것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던 그는 신미를 무척 존경했다. 세조는 세종이 직접 『석보상절』 편찬을 부탁할 정도로 학문적인 기반과 안목도 탄탄했다. 이런 그가 처음부터 왕이 됐더라면, 아니 문종이 병약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골육상잔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사람들은 세조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 피의 길을 걸었다고 했지만 신미는 세조가 국가를 위해 스스로 지옥을 짊어졌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더라도 수미산 같은 업보를 세조인들 피해 갈 수 있을까. 신미는 그런 세조를 위해 기도하고 세조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 힘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불보살님들과 백성들을 위한 길이라고 여겼다.

 

"순행(巡行)후 서로 있는 곳이 멀어지니 직접 목소리를 듣고 인사드리는

일도 이제 아득해졌습니다. 나라에 일이 많고 번거로움도 많다 보니 제

몸의 조화가 깨지는 일도 늦어집니다. 그렇다고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항상 부처님께 기도를 해주시고 사람을 보내어 자주 안부를 물어주시니

다만 황감할 뿐입니다. 행여 이로 인해 제가 멀리서 수행에 전념하고 계신

스님에게 폐를 끼치고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원각사의 일은 널리 들으신 바와 같고 끝까지 서술하기는 곤란합니다.

저의 지극한 정성에 부흥에 스스로 편안하게 머무르시기를 바라옵니다.

금을 보내 드리오니 좋은 곳에 쓰시기를 바라며, 불개(佛蓋)와 전액(殿額)

그리고 향촉 등 물건을 아울러 받들어 올립니다."

 

세조 10년(1464년)에 쓰인 편지에는 신미 대사를 향한 세조의 지극한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다. 실제 세조는 자신의 수기에서 "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존자를 만났고 그분으로 인해 늘 깨끗한 마음을 품고 어둠에 물들지 않았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모두 대사의 공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렇듯 세조가 피부병 치료를 위해서 법주사에 수차에 걸쳐서 행차를 했는데, 이는 당시 복천암에 주석하고 있던 마음속 스승으로 모신 신미스님을 만나서 심신의 병을 치료받고 마음의 안정을 얻고자 함이었다. 속리산 법주사는 모악산 금산사, 금강산 발연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미륵도량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신라 의신 조사가 천축국에 가서 법을 구하여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 머물렀으므로 법주사(法住寺)라 한다"라고 했다.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은 여덟 개의 다리를 건너 아홉 번 돌아야 법주사야 이르게 된다 하여 "팔교구요"라는 이름이 생겼다.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은 "법은 사람을 멀리하지 않았는데 사람은 법을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았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라고 했다.

 

▣ 법주사의 아름다운 건축물

 

<법주사 사천왕문,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천왕문과 사천왕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보은 출신 벽암 각성대사가 1624년에 조성했다. 키가 6m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천왕으로, 지국천왕의 발밑에서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가 벌을 받고 있다. 좌측엔 원숭이처럼 머리를 솟구쳐 올린, 주름진 얼굴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우측에 허리가 눌린 채 검은 모자를 쓴 홍타이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스러워한다. 역사는 그 어디에선가 꼭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400년이 지났어도 아직 죄값을 치르고 있는 두 전범을 보면 전쟁은 가장 추악한 인간의 욕망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경내에 들어서면 법주사의 얼굴은 국보 제55호 오층 불탑인 목조 팔상전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승려 의신이 처음 지은 절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탑 중에서 가장 높은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ㆍ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한 변의 길이가 11m, 높이 65m로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사명대사의 지휘로 1602년에 짓기 시작하여 24년 걸려 복원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급격히 줄어들어 안정감을 주고, 각층에는 창을 달아 내부를 밝게 했고, 꼭대기에는 상륜을 세웠다. 2층 지붕 모서리 공포에는 수호신 야차가 지붕을 받들어 부처님에 대한 공경심을 나타냈다.

 

<법주사 석력지(좌)와 쌍사자 석등(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목탑 뒤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국보 제5호 쌍사자석등(장명등)은 높이 3.3m로 아름답다. 8각의 댓돌에 각 면마다 연꽃을 장식했고, 그 위에 두 마리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선 채 앞발로 연화대를 받들고 있다. 사자 한 마리는 입을 다물어 선(禪)을, 다른 한 마리는 입을 벌려 교(敎)를 나타냈다. 그 위에 연화대와 8각의 화사석과 지붕, 보주를 얹었다. 또 대웅보전 쪽으로 향하면 보물 제15호인 통일신라 때 조성된 높이 3.9m에 4면에 사천왕이 새겨진 사천왕석(장명등) 등이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동쪽에 위치한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연꽃을 띠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석련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니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깍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에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 두었는데, 현재는 균열되어 철제 꺽쇠로 연결해 놓았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는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련지의 대표작이라 불릴 만하다.

 

<법주사 원통보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1624년에 중건된 법주사 원통보전은 보물 제916호로 정사각형 건물에 주심포, 사모지붕형태를 취하고 있다. 내부에는 1665년에 조성된 보물 1361호 목조 관음보살좌상과 남순동자ㆍ해상용왕을 모셨다. 관세음보살님의 얼굴은 네모지고 눈, 코, 입은 가늘게 표현되어 근엄한 모습이다. 특이한 것은 가슴에 신령스러운 기운이 옷고름처럼 날리고, 종아리는 갑대(甲帶)로 무장을 하여 중생구제 서원을 표현했다. 이뿐만 아니라 청룡의 등을 탄 해상용왕은 연화좌에 꿇어앉아 있다. 바닷속에 『화엄경』을 바치고, 거북이 등에서 피어오른 연꽃대좌 위에 꿇어앉아 합장한 채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하는 남순동자의 모습은 "믿음이란 이렇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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