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는 월정사에서도 차로 한참을 더 들어가야 볼 수 있는 사찰이다. 상원사를 보기 위해 들어가다 자칫 월정사를 놓치는 것도 너무 아까운 일이다. 요즈음에는 주차장까지 바로 차로 들어가는 바람에 월정사의 참 멋 중 하나인 700m가량 되는 전나무숲 길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으나 반드시 걸어 보기를 바라며, 또한 전나무숲이 시작되는 일주문의 <月精大伽襤> 편액은 탄허스님의 친필이니 놓치지 말고 한 번쯤 그 기상을 느껴보고 월정사와 상원사를 같이 둘러보자.
상원사 역사와 유래
세조는 자신의 형제들이 그랬듯 부스럼병이 심했다. 1463년 2월 세조는 온양 온천행을 이유로 순행(巡幸)에 나서기도 했다. 세조가 신미에게 편지를 보낸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얘기와 신미의 기도에 깊이 감사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자신도 신미를 위해 지극한 정성을 기울이고 있음을 전했다. 세종의 원찰이 복천사였듯 세조도 자신의 원찰[1]이 있기를 바랬다. 때마침 정희왕후가 세조의 치병 기도처를 부탁했고 신미는 오대산 상원사를 주목했다.
천하의 길지(吉地)이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성지였기에 신미는 이곳이 세조를 위해 더 없이 좋은 도량임을 확신했다.
신미는 학조, 학열 등과 먼저 의발을 내놓고 적극 권선에 나섰다. 오래지 않아 여기저기서 동참의사를 알려왔다. 이 소식은 세조에게도 전해졌다. 감동한 세조는 불사를 돕고자 물자를 지원하라는 어명을 내리고, 직접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을 썼다. 여기에서 세조는 신미에 대한 깊은 감사와 존경의 뜻을 드러냈으며 상원사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신미 등이 쓴 글에는 신미, 학열, 학조 등의 수결(지금은 서명)이 있으며, 세조가 보낸 글에는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이 찍혀 있다. 한글로 번역된 것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 유명하다. 세조와 상원사 및 신미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며, 당시의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장 오래된 한글 서적이면서도 보존 상태가 완벽하여 1996년 11월 28일 보물에서 국보로 지정되었다.
"...내가 왕이 되기 전부터 혜각존자를 알았다. 서로 도가 맞으니 마음이 화(和)하고 매번 티끌 길에 걸릴 때마다 나로 하여금 항상 깨끗한 생각을 가지게 했다. 이 모두 대사의 공이 아니겠는가. 여러 겁의 인연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 같을 수 있겠는가." "세간에 일곱 가지 중한 것이 있으니 불법승 삼보와 부모, 임금 그리고 선지식이다. 삼보는 세간을 벗어나는 근본이고, 부모는 생명을 기르는 근본이며, 임금은 백성의 몸을 보존하는 근본이며, 선지식은 미혹을 인도하는 근본이 된다. 혜각존자 신미 스승을 위하여 같이 기뻐하며 비용을 도와서 끝내 바른 인(因)을 삼고자 한다. 불제자(佛弟子) 조선국왕 이(李)라고 했다.
세조와 문수보살 전설
유교국가에서 국왕이 당당히 불제자임을 표방한 세조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고, 조선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성군이 되었다. 세조의 후원에 힘입어 상원사는 1465년 3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466년에 완공됐다. 한편, 세조는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백이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 피부병에 걸렸다고 한다.
세조는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상원사로 가던 중 계곡에서 혼자 목욕을 하는데 갑자기 어린 동자가 나타나 세조의 등을 밀어주었다고 한다. 세조는 "임금의 옥체를 닦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당부하자 동자는 "임금께서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하였다. 놀란 세조가 돌아보니 동자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급히 화공을 불러 직접 본 동자를 그리게 하고 나무로 형상을 만들어 상원사에 봉안하였으니 지금의 문수동자이다.
상원사 주차장에서 숲길을 걸어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곧바로 상원사의 큰 법당 문수전이 나온다. 상원사에는 일반 절의 중심에 있는 대웅전이 없다. 대신 그 자리를 문수전이 차지한다. 이유는 산 정상 중대(中臺)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기 때문이다. 진신이 있는데 불상을 모시는 대웅전을 굳이 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세조와 인연이 깊은 문수동자와 문수보살을 봉안한 문수전을 큰 법당으로 삼고 있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이다. 우리나라 오대산과 문수신앙은 자장율사에 의해 탄생했다.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주로 대웅전 석가모니불의 좌우에서 협시불로 봉안된다. 주로 협시불이어야 할 문수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것은 오대 중 중앙이라는 점과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인연에서 기인한다.
국보인 목조문수동자좌상 형상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양쪽으로 묶어 올린 동자 머리에 이맛머리는 가지런히 빗질을 하여 단정하고 볼은 포동포동하며, 옷은 부드럽고 편하게 표현됐다. 예배의 대상으로서 모셔진 국내 유일의 동자의 모습으로 복장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에 이 문수동자 형상불을 모셨다'는 내용이 있다.
문수전 계단 아래쪽에는 한 쌍의 돌 고양이가 조각되어 있는데 상원사를 찾은 세조가 문수전으로 들어서려 할 때 고양이가 세조의 용포를 물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알고 보니 법당 안에 자객이 숨어있었다. 덕분에 목숨을 건진 세조는 고양이를 위해 강릉 산속 못 쓰는 제방 안의 200석 지기의 땅 묘전(猫田)을 하사했다.
상원사 불교 문화유산
상원사 동정각(動靜閣)에는 국보로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되고 아름다운 소리와 문양을 지닌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진 범종이 있다. '동정'이란 범종 소리의 큰 울림과 울림이 끝난 다음의 절대적인 고요함을 의미한다. 이 범종은 원래 안동도호부에 걸렸던 것으로 안동 『영가지(永嘉誌)』에서는 "종의 소리가 웅장하여 백 리 밖에서도 들리는 명종"이라 했다. 왕명에 의해 예종 1년(1468)에 오대산 상원사로 옮겨 달았는데 크기는 높이 167cm, 구경 91cm, 두께 48mm, 무게 3379근의 큰 범종이다. 특히 세계 최초로 밀교 37 존불(三十七尊佛) 출생의 만다라를 표현한 범종이다. 한국 범종은 부처님이나 보살 등 초월적인 존재를 직접 형상과 소리로 파악하여 그것과 일치하려는 중생들의 염원을 나타낸 것으로 그 조형에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6.25 전쟁 때는 1.4 후퇴 때 국군이 청야전술 차원에서 상원사를 불태우려 하자 한암스님은 목숨을 걸고 "나는 부처님의 제자이니 법당을 지키는 것이 도리요 불을 지를 테면 지르시오"라며 문수전에서 참선을 했다. 이에 군인들이 감동해 문짝만 뜯어 태우고 떠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대한 그림은 상원사 사자암 법당 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스님의 그 같은 결단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범종과 문수동자를 지켜낼 수 있었다. 우리의 문화재가 불타거나 사라지는 것은 역사에 용서받지 못하는 행위이다. 상원사 한암스님처럼 우리 문화재 수호는 목숨을 걸고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를 알고 본다면 훨씬 더 의미 있는 역사적인 시간이 될 수 있다.
[1] 시주자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 또는 사찰을 이르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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