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을 중심으로 영암 쪽에서는 도갑사가 유명하고 강진 쪽으로는 무위사가 유명하다. 남한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월출산은 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으로 그 경치가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 놓은 것과 같이 산세가 뛰어나며 예로부터 산 주변의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재배되었던 곳이다.
▣ 무위사의 유래
『사지(寺誌)』에 의하면 신라 시대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는데, 875년(신라 헌강왕 1)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 개칭하였다. 이후 1550년(명종 5) 태감(太甘)이 무위사라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원효대사 시절은 이곳이 백제 땅이고 여러 역사적 정황상 원효대사 창건설은 무리라고 보여 왕건과 가까웠던 선각대사 형미스님이 중창한 1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초에는 선종사찰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수륙사(水陸寺)로 유명하였다. 무위사의 '무위(無爲)'는 불교에서 열반세계의 고요에 속하는 세계, 진리의 세계의 존재를 통칭한다. 극락은 무위의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세상이다.
▣ 효령대군이 창건한 극락보전
국보 13호인 무위사 극락보전은 조선 전기에 창건된 사찰건물로 세종 12년(1430)에 효령대군이 지은 것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검박하고 단정한 건물이다. 세종 12년(1430)에 건축된 조선 최고의 건축물이다. 고려시대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조사당을 많이 닮았다. 마당에 부처에게 예를 올리는 배례석이 보인다. 비탈진 지세를 따라 앞쪽에만 얕은 축대를 쌓은 기단 위에 아무 조각도 없는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워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이다. 정면의 가운데 칸이 양옆칸보다 오히려 조금 좁은 것이 특징이다. 또 전체적으로 보아 기둥 높이에 비해 기둥 사이 간격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조선 초기 형태로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으로 지어진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건축미이다. 특히 극락보전 측면의 기둥과 보가 만나 이루는 공간 분할의 절제된 아름다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묘사한 화려한 건물 내부, 조선 초기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 주는 불상과 불화가 특징이다.
▣ 무위사와 아름다운 무형유산 수륙제
왜 무위사에 극락보전이 자리 잡게 되었을까? 고려 말 강진, 해남, 장흥을 비롯한 남도 해안은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다. 고려 말 출몰한 왜구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남도 백성들의 원혼을 위로하고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륙재를 지내기 위해 극락보전을 세운 것이다. 수륙재(水陸齋)는 물과 육지를 떠도는 망령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의식으로 적까지도 포용한 모든 전몰자를 위무하는 불교 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죽은 망자에 대한 애도와 함께 적에 대한 복수심까지 포용하려는 불교의 자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백성을 사랑했던 세종대왕이 출가한 삼촌인 효령대군 감독하에 월출산 자락의 양지바른 무위사에 극락보전을 세우고 수륙재를 거행했던 것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수륙재를 지내면서 왕위에 대한 미련도 이제는 다 떠나보내고 마음의 위안을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무위사의 아름다운 불교문화
극락보전 전각도 멋지지만 극락보전 내부도 아름답다. 극락보전에는 아미타 부처님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이는 현실의 고통을 구제해 주는 관음보살과 사후 극락으로 이끄는 지장보살이 함께하는 정토 신앙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 초기 수륙사였던 무위사의 당시 분위기를 보여 준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 주불인 아미타여래상을 중심으로 좌 관음보살, 우 지장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아미타여래상은 토불인데 반해 관음과 지장은 목불인 것이 특이하다.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은 목불이다. 좌 관음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쓴 채 왼쪽 다리를 내린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우 지장보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쓴 채 오른쪽 다리를 내린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뒤의 아미타여래삼존벽화와 비슷한 시기인 1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불교 미술 양식이 결합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조선 초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자비로운 세 분의 불보살님 뒤로는 아미타 삼존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찬란한 고려불화의 영향과 조선초기 새로운 양식이 결합된 걸작으로 국내 아미타 삼존도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국보 벽화이다. 아미타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쪽에 관음,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그 위로 여섯 분의 나한이 불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원형 구도이다. 빨강과 녹색의 밝은 채색, 화려한 옷의 문양과 영롱한 영락 장식이 너무나 아름답다. 고려 불화의 대표적 기법인 왼쪽 어깨에서 팔꿈치로 흘러내리는 유려하고 부드러운 옷 주름 선은 예술이다. 그리고 이 벽화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극락보전을 완성하고 늙은 화공이 49일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 뒤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49일재 되던 날 주지 스님이 너무 궁금하여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탱화를 그리고 있지 않겠는가? 크게 놀란 주지 스님은 비명을 질렀다. 마침 파랑새는 마지막으로 관세음보살님 눈동자를 화룡점정하고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님은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화룡점정의 완성을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방심과 부정을 타지 않고 결계를 잘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효령대군은 무위사 창건 이외에도 다방면에서 불교의 중흥에 크게 기여했다. 관악산의 연주암(戀主庵)을 중건하였는데, 이것은 현재에도 연주암에 효령대군의 초상을 봉안한 효령각(孝寧閣)이 있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월출산 무위사, 만덕산 백련사 중창 및 양주 회암사의 중수를 건의하였고, 수많은 불사 개최의 중심에도 그가 있었다.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면서 효령대군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한 것 역시 효령대군이 불교에 깊은 지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외에도 불교 경전의 언해 사업에 적극 참여해 조선 전기에 불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효령대군의 삶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91세라는 이례적인 장수다. 조선 역대 왕의 평균 수명이 47세인 점을 고려하면 효령대군의 장수는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왕 중에는 영조가 83세라는 장수를 누렸는데 영조보다도 장수한 셈이다. 효령대군의 장수는 권력에의 미련을 버리고 불교에 심취해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해 주면서 전국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닌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23.02.20 - [힐링 사찰 여행] - 연주암과 무위사, 비운의 왕세자 효령대군의 사찰(1)
2023.02.20 - [힐링 사찰 여행] - 관악산 연주암, 비운의 왕세자 효령대군의 사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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